여성단체 424개 경찰 강력 규탄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찰의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찰의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부가 지난 정권에서 4대악으로 규정한 가정폭력을 근절하고 젠더폭력에 적극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찰의 인식과 초동 대처는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비밀쉼터에 침입한 가해자를 경찰이 방관하고 오히려 가해자 입장을 대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고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상임대표 고미경) 등 여성단체는 9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강력 규탄하고 철저한 진상조사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424개 여성단체와 한국여성의전화 회원을 비롯한 120여명이 함께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의 서재인 시설장은 “지난 2일 오후 7시 50분께 가정폭력 가해자가 쉼터에 침입해 활동가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가해자가 위해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격리조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한 시간이 지난 후 출동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 2명은 ‘자녀를 보기 전까지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요구를 수용하며 오히려 활동가들에게 가해자를 대면해 설득할 것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특히 그는 “경찰은 ‘나도 자녀가 있는 아빠다’ ‘그는 자녀만 보면 돌아갈 사람이다’ 등의 발언을 하며 보호시설과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또 “가해자가 활동가들의 사진을 찍으며 모욕하는 사이에도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측에 따르면 남자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쉼터 앞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활동가들이 경찰에 가해자의 임의동행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주거침입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활동가들은 직접 현수막으로 가해자를 둘러싸 시야를 가린 뒤 입소자들을 다른 보호시설로 피신시켜야 했다. 단체 측은 “이 과정에서 가해자가 소리를 지르며 피해자에게 가까이 가려는 행동을 보였으나 경찰들은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이번 사건에서 경찰은 무대응, 무조치, 무성의했다. 경찰은 오히려 가해자를 비호했으며 가해자의 편이었다. 경찰이 이번에 보인 태도는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인권침해”라고 강력 비판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이번 사건의 피해 당사자의 자녀가) 여기는 아빠가 모르죠? 여긴 아빠가 안 오는 데죠?’라고 활동가들에게 재차 물어 ‘여긴 비밀의 집이야. 아빠는 알 수 없어’라고 안심시킨 게 여러 번”이라며 경찰이 보인 안일한 태도를 지적했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정미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 전국연대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정미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 전국연대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폭력보호시설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운영되는 시설이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동반 자녀들이 긴급 피신해 안전을 보장받는 곳이기 때문에 비공개로 운영된다. 따라서 이곳에 가해자가 침입했다는 것은 피해당사자와 다른 입소자 및 활동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인 셈이다.

그러나 경찰은 ‘(가해자가) 주거의 평온을 깨지 않았다’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가해자 임의동행을 요청한 활동가들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허순임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대표는 “피해자와 활동가를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경찰의 태도를 규탄한다”며 “피해자가 가해자 면담을 거부하고 가해자와의 격리를 요청함에도 경찰은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활동가 의견을 묵살하고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일삼았다. 이게 2차 피해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여성폭력 피해가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안녕하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쉼터는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공간에서 피해를 딛고 설 힘을 키우는 피난처다. 쉼터조차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피해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규탄했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거주했던 피해자가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9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려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거주했던 피해자가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처럼 가정폭력 가해자가 보호시설을 찾아내 침입하는 행위는 전국 쉼터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운영 중인 가정폭력보호시설은 전국의 67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비슷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어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해왔지만 결국 오늘에까지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20년이지만 경찰이 각종 여성폭력 사건에서 미흡한 태도와 안일한 대처를 지속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여성폭력에 대한 기본적 인식조차 없는 경찰의 전문성 부재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촉구가 높아지고 있다. 

이날 활동가들은 “경찰청장은 책임자 징계하고 공식 사죄하라”며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을 촉구했다. 이들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경찰과 관련 책임자 징계와 피해자 및 보호시설에 공식 사과 △가정폭력(여성폭력) 및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시설에 대한 경찰의 인식향상교육 계획 수립 및 실시 △제대로 된 가정폭력 사건 초동대응 대책 마련 및 실시 △가정폭력(여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종사자 안전을 위한 대책 즉시 마련 △국가의 가정폭력(여성폭력) 정책 및 시스템 전면 보완·개편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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