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책 『소설가의 각오』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쓰면 안 된다.’ 이것은 이 책에서 하나의 분명한 원칙으로 제시된다. 여자들이 읽는 작품은 깊이가 없고 진정한 예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대학 때 읽었던 어떤 책은 한국 문학사를 모더니즘 계열, 사실주의 계열, 기타 등등, 그리고 여류문학으로 분류했다. 같은 부류로 결코 묶일 수 없는 작가들이 성별에 따라 ‘여류’에 묶여 있었다. 여자가 쓴 작품은 모더니즘에도 사실주의에도 낄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가는 인간 보편이 아니라 여자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 습작을 하면서 나는 어떤 ‘보편’의 문제에 부딪혔던 것 같다. 내가 쓰는 글이 보다 보편이 가까워지기 위해서 소설의 화자도 남성이나 무성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했던 적도 있다. 표준 인간이란 남성이기 때문에, 아니, 적어도 여성은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문학’이라는 장 안에서 나의 무의식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으로서의 나’를 노출하는 순간 여류라는 프레임 안에 갇힐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여자 작가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루시 바턴이라는 한 여자가 작가가 되는 이야기로 읽었다. 루시는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가족과 단절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글로 쓰기 시작하고 그렇게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하며 작가가 된다. 그녀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는 친구 앞에서 당황한다. “별거 아닌데 정말로 작은 문예지에 실린 거예요.” 그녀는 말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그녀는 우연히 세라 페인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세라에게 직업을 물어보자 세라는 “그냥 작가예요. 그게 다예요”라고 말하며 그 주제를 피하고자 한다. “저기, 그러니까, 책을, 소설 같은, 뭐 그런 정말로 대단치 않은 걸 써요.” 그녀는 답한다. 이 두 작가의 모습이 나는 낯설지가 않았다. 자신을 작가라고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은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독자들 앞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세라의 모습, 자신의 지적 권위로 그녀를 휘두르려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루시에게 세라는 말한다. “내 말을 잘 들어요. 깊이 새겨들어요. 당신이 쓰고 있는 이것, 당신이 쓰고 싶어하는 이것. (중략) 자기 글을 절대 방어하지 마요.”

루시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한다. 루시의 언니와 오빠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성인이 된 사람들이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다른 이들을 짓누르는 모습을 본다. 물론 아이들보다는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루시가 말한 이 저속함이 ‘여류’라는 말에 깃든 근본적인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쓰는 여성들을 내리누르는 오염된 말은 어떤 권위를 위한 것이었을까. 여자 작가치고는 잘 쓴다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나의 여자 선배들이 쓴 책을 읽으며 통과해온 시간들이 있었다. 그 작품들은 따돌림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었다. 따돌리고, 짓누르는 사람들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루시의 말대로 “나는 진실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조롱과 편견의 먹잇감이 된다고 해도 말이다.

*여류(女流)? 전문직 여성을 일컫는 말로, 성별을 불필요하게 강조한 성차별적 표현이다.

최은영 소설가. 지은 책으로 소설집 『쇼코의 미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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