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30년, 용기와 연대의 기록] ③ 부부싸움에서 아내폭력으로
[여성운동 30년, 용기와 연대의 기록] ③ 부부싸움에서 아내폭력으로
  • 박인혜 전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상임대표, 현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09.25 18:10
  • 수정 2017-09-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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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여성폭력 중

가장 먼저 제기된 이슈

‘아내강간’ ‘데이트 폭력’ 등

담론 투쟁

제도화 한계 넘어

대안적 인식 개선 운동으로

 

2012년 5월 16일 여성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죽음의 행렬을 멈춰라! 거리행동 ⓒ한국여성단체연합
2012년 5월 16일 여성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죽음의 행렬을 멈춰라! 거리행동 ⓒ한국여성단체연합

가정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제기된 이슈다. 가정폭력 추방운동의 성과 또한 참으로 크다. 가정폭력 추방운동은 아내폭력을 여성문제로 자각하고 사회문제로 드러냈다. 여성주의 상담과 쉼터라는 피해자 지원 모델을 만들어 냈으며, 여성인권 문제로 끌어올려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의 책임성을 확립하고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입법운동과 제도화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가정폭력 추방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반면 가정폭력 이슈가 여성정책 대상이 되면서 가정폭력 추방운동은 피해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복지 서비스로 축소됐고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상담소는 정부 사업을 위탁받는 수행기관으로 그 위상이 저하됐다. 여성운동의 자율성 축소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와 함께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가정폭력 추방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자기성찰을 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가정폭력 추방운동은 새롭게 싹튼 여성운동의 주체들과 함께하는 제도화 이후의 대안적인 운동을 시도하고 있다.

 

제도화를 넘어

지구화는 다양한 정체성과 욕망과 감수성을 가진 다중 주체들을 출현시켰다, 여성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폭력을 경험하게 됐다. 권위주의적인 국가폭력은 감소했으나 가정폭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적 공간에서, 개인과 개인 사이에, 나아가 친밀한 관계 등에서 여성폭력이 증가했다. 게다가 아내강간, 정당방위, 재산권 등 법제에서 제외된 오래된 이슈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런 문제들은 상담과 입법 운동이라는 전통적인 운동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도화는 여성의 경험을 충실히 반영하기보다는 일상의 견고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남성 중심적인 법 개념을 그대로 내장한 채 진행됐다. 입법화를 위해 여성주의 관점을 관철시키기보다 남성 중심의 법 개념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한계였다. 가정폭력 추방운동은 심화·확장되는 가정폭력 근절을 위해 상담과 인권지원, 입법운동이라는 운동방식을 넘어 가부장적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킬 대안적인 운동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운동 방식은 가정폭력 쟁점 드러내기와 개념 확장, 당사자운동, 영상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인식 개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열린 가정폭력방지법 전문가 워크숍 ⓒ한국여성단체연합
1995년 열린 가정폭력방지법 전문가 워크숍 ⓒ한국여성단체연합

정당방위와 아내강간

가정폭력 쟁점은 남성주의적 법과 제도가 여성의 경험과 그 맥락을 무시하고 현실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갈등 속에 내재해 있다. 이 점을 잘 드러낸 것이 정당방위와 아내강간 인정 운동이다. 정당방위 개념은 즉각적 공격에 대한 즉각적 방어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자기방어 능력과 의지를 갖춘 성인 남성을 전형으로 한다. 그러므로 장기적이며 일상적인 폭력 아래 놓여 있는 피해여성들의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법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이하 여성의전화)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하게 되는 것은 정당방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운동 초기부터 주장해왔다. 2000년 들어 이러한 사건이 빈발하자 여성의전화는 토론회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살해 정당방위 인정될 수 없는가’를 열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정당방위를 쟁점화했다.

2000년 별거 중인 남편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다 남편을 살해한 김00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의전화는 아내강간은 기혼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지배하는 폭력이란 점을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별거 혹은 이혼 중에 발생하는 강제적인 성관계를 아내강간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법 개정에 반영하고자 했다. 형법상 강간이란, 여성의 정조에 대한 죄이며 법적 보호대상은 부녀다. 남편에 속한 아내와 아내의 성은 부녀의 범주에 속하지 않고 남편은 아내의 정조를 보호할 의무가 없으므로 아내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법 개념의 핵심이다.

법 개정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쟁점화한 지 4년 만인 2004년 헌법 공포 후 처음으로 아내강간을 인정하는 판례가 나왔다. 2009년 이후에는 아내를 부녀에 포함시키고, 2015년 흉기 없는 아내강간을 인정하는 판례, 2017년 아내에게 약을 먹여 성관계를 가진 남편을 아내강간으로 인정한 판례가 나온 것은 간접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쟁점 드러내기 방식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공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성들이 일상에서 폭력을 드러내도록 하는 당사자운동이 모색됐다.

 

2000년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살해 정당방위 인정될 수 없는가’ 토론회 ⓒ한국여성단체연합
2000년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살해 정당방위 인정될 수 없는가’ 토론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당사자 운동의 가능성 열어

입법 운동이 대리인 운동이라면 당사자 운동은 피해여성이 자신의 문제와 경험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가정폭력만이 아니라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다양한 폭력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드러내도록 돕는 운동방식이다. 당사자 운동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이혼숙려제 도입 반대운동과 데이트폭력 추방운동이었다.

2005년 서울가정법원과 법무부는 이혼율이 급증하는 것은 이혼절차가 쉽고 당사자들이 경솔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예단하고 이혼숙려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을 제출했다. 이혼을 해야 하는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에게 강제로 숙려기간을 갖게 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많다고 판단한 여성의전화는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이혼당사자 여성의 고통스런 경험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당사자 집담회를 열었다.

집담회는 같은 상황에 있는 여성 당사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이혼여성 당사자모임(당당한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임, 당나귀)이 조직됐고 2008년에는 시흥·영광 등의 여성의전화로도 확산됐다. 또한 한국·일본·홍콩의 이혼당사자들 이야기 마당인 ‘싱글맘의 수다’를 서울에서 개최하는 등 아시아 여성 연대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이혼 전 상담 의무화와 유료화가 삭제되고, 법의 목적을 이혼예방에서 자녀의 복리로 변경한 수정안이 통과됐다.

데이트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폭력을 말한다. 데이트폭력은 가정폭력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친밀한 관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이란 용어는 폭력은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데이트폭력이란 용어는 여성폭력이 가정을 벗어나 친밀한 사적 관계 전반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줬다.

여성의전화는 데이트폭력 근절과 예방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2003년 청소년 이성간 폭력실태조사, 2008년 상담에 나타난 데이트폭력의 경향성 분석, 2009년 서울 지역 11개 대학 800여명 대상 ‘데이트폭력 경험 실태조사’, 아시아 3개국 데이트 폭력 설문조사, 2016년 데이트경험이 있는 성인 여성 등을 대상으로 데이트폭력 경험 실태조사 등을 진행하고 결과 발표 및 토론회 등을 개최했다. 데이트폭력 예방을 위한 지침서와 종사자 매뉴얼 등을 제작하고 배포했으며, ‘안녕 데이트공작소’(sogoodbye.org) 홈페이지와 ‘데이트 UP 데이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배포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는 데이트폭력 예방을 위한 대중강좌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를 진행했다. 2014년 ‘데이트공작단’이 결성되면서 데이트폭력 추방운동은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됐다.

데이트공작단은 ‘데이트 이슈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20대’ 활동가들로 구성된 당사자 운동 주체로 ‘차별과 폭력이 판치는 연애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진정한 연애의 철학과 기술을 전파’하고자 하는 모임이다. 이들은 캠페인과 홍보물 제작, 글쓰기 및 소책자 발간,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 등의 활동을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다. ‘愛 : say’라는 연애매거진을 발간해 자신들의 경험과 주장을 소개하고, 20대의 성 의식과 연애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전국공정연애실력고사’라는 캠페인도 벌이는 등 젊은 세대의 특성을 담은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7년 5월 31일 열린 가정폭력 피해 성인자녀 집담회. ‘집 안보다 집 밖이 더 안전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주제로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
2017년 5월 31일 열린 가정폭력 피해 성인자녀 집담회. ‘집 안보다 집 밖이 더 안전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주제로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영상과 시각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겨냥한 영상과 SNS를 활용한 가정폭력 인식개선 활동이 본격화됐다. 여성인권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2006년부터 시작됐는데 제10회가 되는 2016년 전국 8개 지역에서 공동 진행되는 등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5년에는 4200여명이 관람하고, 39개 공동체 상영에 27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지금까지 상영된 영화들은 아카이브로 구축돼 있다.

2015년에 시작한 여성폭력 예방 연중 캠페인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단발적인 캠페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캠페인 방식을 개발한 결과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카피를 케이블 영상 광고, 지하철 광고, SNS 등에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폭력과 차별의 순간, 그리고 그 징후는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피해자와 방관자의 ‘의심’을 지지하고, 대중의 힘으로 폭력상황을 막을 수 있는 힘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다소 도발적인 이 카피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재가 됐고 카피를 빌려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

온라인 캠페인 ‘기억의 화요일(화요시위)’은 2012년 오원춘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여성폭력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동행동’의 광화문 1인 시위로 시작됐다. 2013년 공동행동은 마감했으나 여성의전화는 2014년까지 전국의 지부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계속 이어나가다가 2015년부터는 화요논평으로 개편, 온라인상에서 지속하고 있다. 2015년 한 해 동안 47개의 논평이 게시됐고 SNS 최대 치는 8729회였다. 그 밖에도 ‘분노의 게이지’를 통해 “2009년부터 언론에 발표된 기사 중 친밀한 관계(남편이나 애인 등)에 의한 여성살해 통계를 발표하여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러한 시도 속에서 20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쑥쑥 성장하고 있다.

 

미래와 손잡고

지난 30여년의 운동을 통해 여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문제의식과 자각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현실과의 괴리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결과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온·오프라인 상의 전국적인 대응 등이 그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아 새롭게 자각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경험을 드러내는 페미니즘이 새로이 구성되고 있다.

여성폭력의 경험은 유사하지만 그 경험을 체험하는 주체는 예전의 여성들과 아주 다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한다. 기존의 운동을 조직과 제도라는 갇힌 공간에서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이들의 운동은 조직과 제도에 연연하지 않는 열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과 SNS를 활용한 인식 개선 운동의 지향이 새로운 세대를 포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선배 여성운동이 이들과의 연대와 역할분담을 적극 고민해야 할 때이다. 가정폭력 추방운동은 이 새로운 주체들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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