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당하면 어디서 만나요?”

 

남현동 철거민 전미숙 씨
남현동 철거민 전미숙 씨

관악구 남현동 567번 종점 옆, 비닐하우스촌. 이곳은 남현동 일대가 국방부 주요지로 지정된 이래 반대투쟁을 하다가 지난 8월 철거당하자 ‘서우철거민협의회’가 지어준 4동의 비밀하우스에 16세대가 모여살며, 끝끝내 정하고 있는 곳이다.

며칠전 내린 눈으로 질퍽질퍽한 땅에 비닐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언땅에 대충 장판으로 방을 만들고 철거터에 어렵게 긁어다 모은 세간 몇가지가 전부.

“그동안 학생들 데모하다 죽으면 바보같이 죽냐했는데 이제는 학생들이 없는 사람 위해서 싸웠다는 것을 알겠어요. 선대책 후철거라는 정부의 발표를 철석같이 믿었는데…. 대책없는 철거와 탄압을 용서할 수 없어요.” 어렵게 끌어온 수도로 빨래를 하던 전미숙(33) 씨의 이야기다.

전라도가 고향인 전씨는 81년 목장 관리를 하던 이덕용(40) 씨와 결혼, 82년 서울에 올라와 남현동에서 3백만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오늘까지 살아왔다. 시골에서는 죽도록 일해봤자 하루 품삯이 2천원에 불과한터였다. 그래 남현동집을 새고향으로 여기며 비새면 개량도 하고 내집처럼 가꾸면서 살아운 것이다. 남편이 기술이 없어 비오는 날이나 겨울이면 어김없이 허탕치는 일용 노동일을 하면서 한달에 겨우 20만원을 벌어와도 젊음이 있어 희망을 잃지않았다. 가방 만드는 공장이레 식당 일을 해오다 임신으로 손을 놓게 되었을 때도 내가 노력해서 찾으면 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다 철거가 찾아왔다. 5년간 구청과 싸움을 하면서 경찰서로 끌려가고 입원한 것만도 수차례. 전경의 워커발에 가슴이 짖밟힌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아침에 철거한다는 소리를 듣고 출근한 남편이 불안한 마음에 공사장 4층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져 하루벌어 하루 사는 신세에 한달간의 통원 치료는 그대로 빚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6시, 포크레인을 비롯한 수백명의 철거깡패에 의해 철거가 강행됏다. 그때 전씨는 두발, 두다리가 깡패드에 붙잡힌 채 자기의 보금 자리가 부쉬지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다.

“철거깡패도 죄 16,17세 어린 것들이예요. 너희는 헐일도 없고 에미 ․ 애비도 없냐했더니만 ‘아줌마 나 하루 3만원받으니 그 값은 해야지않겠냐’는 거야. 맞아 죽는거야 무섭지않지만 그 애들 한심한거 이 나라 망하는거야 어떻게 보겠어요” 파출부 일을 한다는 여인자(43) 씨가 그때의 일을 회상하곤 치를 떨었다.

게다가 철거와중에 입시를 치른 아이들은 하나둘 떨어졌고 ‘차라리 하루살다 말더라고 이사가자’던 울부짖음도 빈손의 설움만 더하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닐하우스를 지키며 버텨내던 이들에게 이곳 유치원 아이가 비디오을 보고 싶어 친구 집엘 쫓아갔다가 친구 엄마가 ‘저동네 애들은 나쁘다’며 들여보내지않아 안에서 불러줄 때까지 현관앞에서 기다리가 해가질때야 돌아온 사실은 그야말로 한이 되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곳 아이들의 소원은 대문있는 집에 사는 것. 오늘도 이곳의 아이들은 학교갈때면 ‘어마철거당하면 우리 어디서만날까’를 확인하고 퇴근길의 부모들은 먼발치서 비닐천막이 뵈지않으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이다.

철거로 인해 그나마의 직장도 잃고, 구청이다 경찰서다 쫓아다니느라 제때 식구들 밥도 못챙겨줘 상한 가슴에 속절없는 부부싸움만 벌이면서도 이제 남은 거라곤 심장병앓는 병든 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들은 철거싸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철거가 오늘 내일로 닥쳐온 채 대책이 없는 까닭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이라곤 불우이웃 성금 2백, 국방부 보조비 2백, 이주 보상비 40의 4백 40만원을 받고 고이물러나는 것일 따름이다.

“이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병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없이살아도 친지보다 더한 정을 나누며 살아온 16세대와 뿔뿔이 헤어져야하다니…. 그러나 우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습니다. 오히려 이젠 우리도 싸워서 내권리를 찾아야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떡국을 끓여 16세대가 모두 둘러 앉아 대충 또 한끼를 채우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현실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를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포장마차를 하는 신춘옥 씨

“온 몸이 다 아파요”

뿌옇게 새벽이 밝아오며 모두가 단잠에 빠져있을 무렵, 세운상가 앞 포장마차에서는 하루장사를 끝낼 채비에 부산하다. 신춘옥(44) 씨는 남편 노수희(47)씨와 함께 포장마차를 하며 하루를 먹고사는 노점상. 지난 80년 사업에 실패, 서울로 올라온 후 포장마차를 시작한 지도 6년이 왰다.

그것은 저녁 5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12시간 노동에 가사일까지 겹친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밤새 얼어붙어 지친 몸을 끌고들어와 남편이 잠자리에 들때 그이은 아침짓고 도시락 싸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것. 그제서야 3 ․ 4시간 잠간 눈을 붙이고서 그날의 장사를 위해 시장보고 안주거리 장만해 아이들의 저녁을 지어놓고는 또다시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이 노점상연합회 일을 해서 실제 장사는 내가 다하는 셈이죠. 밤세워 하는 일이라 온몸이 안아픈데가 없고 힘들어 죽겠어요. 우리는는 하숙생이예요. 나는 장사와 돈밖에 모르고요. 우리 애들은 엄마 ․ 아빠가 이런 일하는걸 챙피해하죠. 아이들 구김살없이 키워야하는데 돈 없으니 어쩌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열심히 벌어봤자 한달 수입은 40만원에도 못미친다. 이는 실제로 장사 할 수 있는 날은 20여일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재고가 많은 까닭. 그래도 다른 노점상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셈이었다.

그러나 노점상 단속과 철거가 늘 이들이 삶을 위협한다. 그간 철거를 당한 횟수만도 5, 6번. 그때마다 일수빚을 얻어 새로이 시작하노라면 저축은 커녕 전셋집을 면할 낮이 없다. 게다가 철거 한번 당하면 리어카 뺏겨, 경찰서에서 하루벌이 공쳐, 벌금까지 내야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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