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도 당당한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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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구의 10%가 농업인구다. 그 중 여성농민은 절반이나 된다. 하지만 여성농민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나 생활형편은 남성농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농민을 위해 활동하는 윤금순 회장(42세·성주군여성농민회장·전국여성농민회부회장)을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성주군 대가면 오두산막에 갔을 때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농사 짓는 것이 꿈이었어요. 가장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죠.”

경기도 강화가 고향인 그는 농가의 4녀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3년 후에야 출생신고를 하며 얻은 이름이‘금순’이었다. “그 전 까진 언년이, 간난이라고 불리웠는데 그 때 아마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가 유행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하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8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농사를 짓겠다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집성촌이였던 시골마을에서 정규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고 하고, 더구나 대학 때 운동하면서 수배자가 되었던 전력 때문에 수시로 찾아오는 정보기관 사람들과 경찰들 때문에 윤회장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육아문제 관심갖다 여성농민운동 뛰어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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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 여성농민포럼 참석자들과 함께(왼쪽 첫번째).

어느 날 윤회장의 아버지는 딸을 조용히 불러 “네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안 보이는데 가서 하라”고 말했다. 그 상황에 대해 윤회장은 “전 그 때 기뻤어요. 내가 하는 일을 아버지께서 인정 해 주셨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라고 회상한다.

그 후 윤회장은 농민운동을 하던 선배들과 의논 끝에 충북 중원군(지금 충주시에 통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우선 농민들에게 큰 부담 중에 하나인 육아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를 빌려 어린이집을 열었다. 인가를 받은 정식 어린이집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2년 동안 일했다.

그는 농민들은 열심히 사는데 사회구조적 문제가 농민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런 현실에서 농민 스스로가 일어 설 수 있는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때부터 윤회장은 어린이집 교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여성농민들은 물론 지역청년들을 비롯한 많은 농민들을 만나면서 소모임을 만들었다. 마침내 87년 2월에 ‘충북중원군농민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윤회장은 그해 9월에 ‘충주시농민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농민운동에 들어서게 되고 90년에 결혼을 하면서 공식적이고 본격적인 ‘여성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농촌에서는 보육시설 미비로 육아와 농사를 병행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중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어린이집을 만드는 거였죠. 임신 중에 탁아소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바자회도 열었죠. 그리고 부스러기선교회의 많은 도움으로 문을 열게 되었어요. 준비기간동안 여자들 못지 않게 남자들도 적극적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가족농 구조에서 여자들이 아이들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면 결국 남자들도 힘들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준비해서 문을 연 탁아소가 다음날 찾아온 공무원들에 의해 문을 닫을 뻔했다. “공공기관에서 너무 비협조적이었어요. 불법이라면서 시설을 갖추라고 경고를 하는데 형편이 되어야죠. 그래서 결국 놀이방으로 허가를 냈어요. 그런데 워낙 시골이라 선뜻 오겠다는 교사가 없어 결국 96년에 문을 닫아야 했어요”라며 윤회장은 그 때의 아쉬움을 전했다.

남편 빚 떠안아 ‘빚부자’로 전락한 여성조합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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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참외골 여성정기총회에서(앞줄 오른쪽 세번째).

윤회장은 남편과 교대로 전국농민회 일을 했다.남편이 전농일을 하면 윤회장은 지역의 일을 했고 윤회장이 전농일을 하면 남편이 지역을 지켰다. 97·8년엔 서울에서 전농일을 하느라 지역과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어요.”농사일은 물론 가사, 육아에서부터 지역의 농민회 일까지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 후 그는 참외골여성회(성주군여성농민회)를 만들어 여성농민이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남자들과 똑같이 농사일을 하면서도 농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남편과 따로 농사를 지었다.

“농사일에 관한 모든 결정은 남편이 하고 여자는 품만 팔 뿐이었죠. 농사를 따로 짓고 싶은데 땅은커녕 호미 한 자루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93년에 영농후계자 신청을 냈는데 95년에야 겨우 되었어요.” 영농기반이 없는 여성에게 영농후계자의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금을 받아서 기쁜 것 보단 농민으로 인정받아서 기뻤어요”

하우스를 짓고 기계를 넣었다. 오이, 피망을 생산했고 ‘윤금순’이란 이름으로 출하도 했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그는 더욱더 여성농민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인 병해충에 대한 예방법 등에 관한 영농교육이 남자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계를 가져온 사람도 남편만 찾다가 설명도 안 해 주고 가는 거예요. 내가 기계를 사용 할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또 내 이름으로 출하했는데도 출하대금은 남편통장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그는 여성들의 의식이 남편들, 남자들에게 묶여 있는 것을 깨고 주체의식을 찾아야 한다고 더욱 강조한다.

여성농민에게 ‘희망주는 정책’ 마련됐으면

96년부터 복수조합원제가 시행되면서 그는 조합원 신청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사회의 거부’였다. 그는 이사진의 명단을 들고 조합장을 찾아갔다. “나는 조합원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 당신이 조합의 대표니 당신을 고발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그는 조합원으로 인정되었고, 그 후 여성조합원들이 대거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힘겹게 싸워서 쟁취한 조합원의 자리는 연체로 인한 남편들의 빚을 여자들이 떠 안게 되면서 ‘빚부자’로 전락되었다.

“경북도의 25.4%가 여성농민예요. 그러나 여성농민들의 사회적 지위는 농업노동의 보조자, 무보수 가사노동자로 인식되어 생산자인 농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여성농민도 엄연히 농업이라는 직업을 가진 직업인입니다”라며 “여성농민이 농업전문경영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작업환경 개선과 경제·사회·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만 한다”고 윤회장은 힘주어 말한다.

이처럼 여성농민을 사회의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하라는 윤회장은 “미비하나마 정부는 여성경제인이나 실직여성들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성농민에게는 그런 혜택이 전혀 없어요. 게다가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여성농민은 소득은커녕 무임금 노동상태가 되었어요.”

윤회장은 ‘여성농민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2년에 한번씩 열리던 전국대회를 앞으로는 지역단위로 더욱 활성화 시킬 계획이다.

“여성농민은 최전선에 있어요. 여성농민들이 무너지면 농업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고 봐요. 어떤 사회든 남녀가 같이 가야 하는데 특히 농업은 여성인구가 확보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렇지만 이런 구조 속에 누가 농사를 짓고 싶겠어요.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도 떠나잖아요. 농촌으로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어 연변이나 필리핀 여성들이 와서 고생하는 것 보면 맘이 아파요.”

윤금순 회장에게는 지금 두 가지 바램이 있다.

여성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농업정책이 하루 빨리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과, 여성단체들이 여성농민 문제 해결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함께 했으면 하는 것이 그것이다.

<경북 권은주 통신원>

윤금순 부회장 약력

82년 서울시립대 환경공학과 졸업

84∼87년 충북 충주시 금가면 비인가 농촌보육시설 문산어린이동산 설립운영

87∼90년 충주시 농민회 사무국장

93∼96년 경북 성주군 농촌보육시설 대가어린이집 설립운영

94∼97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 95년 농민후계자 선정

96∼97년 경북여성농민회연합 부회장 / 97∼99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총장

99∼2000년 경북여성농민회연합 부회장 / 2001∼현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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