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려차 여성의 몸 만졌는데

그게 무슨 성추행이냐고?

 

시대가 변했다… 법의 심판

받기 싫으면 그만 좀 만져라

니들 때문에 여자가 피곤하다

 

같은 직장에 몸매가 좋은 여자가 있다고 치자.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평소에 잘해줘서 환심을 사면 된다. 초등학생도 알 만한 이 논리를 일부 참을성 없는 ‘한남’들은 거부한다. 그들에게 ‘남자’는 ‘오늘 원하는 걸 내일로 미루지 않는 존재’니까.

결국 그는 그녀의 신체 일부를 더듬는다. 과거였다면 이 상황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째려보거나 불쾌한 표정을 살짝 내비치는 게 고작이었다. 상대가 자기 직장상사라면 그나마도 어려웠다. 그 자리에선 이렇다 할 반항도 못하다, 나중에 혼자가 됐을 때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삭여야 했으니까.

시대가 변했다. 이제 가벼운 접촉도 성추행으로 인정돼 법의 심판을 받는다. 설령 처벌을 피한다 해도 그는 직장에서 파렴치범으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한다. 일국의 대변인이 미국서 만난 인턴의 엉덩이를 ‘grab’했다가 5년간 폐인 생활을 한 게 대표적인 예다. 이쯤 되면 자신들이 원할 때 마음껏 만지는 시대가 갔다는 걸 인정해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한남’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짠다. 첫 번째 유형은 일단 만지고 난 뒤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는 것이다. 성추행은 증거가 남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특히 사람이 많은 지하철은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데 최적의 장소다. 그래서 포털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판을 친다.

 

“가만히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다 보니 제 팔이 여자의 가슴에 닿았어요. 전 정말 억울해요.”

“전 아무 짓도 안했는데 앞에 있던 여자가 저를 찍어서 성추행했다고 고소했어요.”

“내리려고 문 쪽으로 가다가 어깨 좀 건드린 거 가지고 소리를 지르며 성추행이라고 난리를 치네요.”

 

진짜로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오랜 기간 성추행에 단련된 탓에 의도를 가지고 만진 것과 어쩔 수 없이 만진 걸 구별할 수 있다. 게다가 여성들은 웬만한 확신이 없다면 특정인을 범인으로 몰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저 남성들이 억울한 이유는 “저 여자가 고소할 줄 알았다면 다른 여자를 만지는 건데”라는 차원이리라.

두 번째는 만진 것은 인정하나 의도가 좋았다고 우기는 유형이다. 다시금 포털사이트의 글을 참조한다.

 

“제가 평소 여직원, 남직원들에게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하는 편인데, 신입사원이 브래지어 끈을 만졌다고 그걸 성추행으로 신고했습니다.”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있는데요. 무슨 일을 시키면 항상 자신없어하고 해서 제가 격려 차원에서 일을 시킨 후 잘 했다며 어깨나 등 쪽을 다독인다 생각하고 톡톡 쳤을 뿐인데, 글쎄 저를 고소했습니다.”

“며칠 전 여직원이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 하기에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며 힘내라고 격려해 줬습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이 저를 성추행으로 고소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직장에서 제가 막내여직원에게 열심히 하라고 토닥여주고 어깨 톡톡 쳐주고, 그런 건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추행을 한 것도 아니고요. 이게 성추행인가요?”

 

이 유형에 속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격려차 만졌는데 그게 무슨 성추행이냐는 것이다. 여성을 만지는 건 결국 그 일을 해낸 자신에겐 격려가 될지언정, 해당 여성에겐 격려는커녕 불쾌감만 줄 뿐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것일까?

호가 ‘grab’인 윤창중 선생도 기자회견에서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해당 인턴에게 일을 잘 못한다고 야단친 게 미안해 위로의 차원에서 술을 샀으며, 격려 차원에서 허리를 한번 툭 쳤다.”

위에 적은 사연들과 신기하리만큼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격려 운운하는 말은, “여성이 노출이 심한 차림을 해서 강간했어요”라는 말처럼 남성들이 자신의 성추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판에 박은 변명이리라. 남성들이여,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발 그만 좀 만져라. 니들 때문에 여자들의 삶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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