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래퍼 슬릭

힙합 내 여성·성소수자 혐오 꼬집는 랩으로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이름 알려

 

우에노 지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읽은 후

한국사회 내 만연한 ‘여성혐오’ 깨달아…

 

“페미니즘 공부해 올바른 마음으로 사는 것,

아티스트로서 세련된 음악 하는 게 목표”

 

래퍼 슬릭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신곡 ‘MA GIRLS’는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가 엿보이는 곡이다. 그는 노래로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든든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래퍼 슬릭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신곡 ‘MA GIRLS’는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가 엿보이는 곡이다. 그는 노래로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든든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긴 아직도 기집애라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아무도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모른다면서.” (지난해 유튜브 힙합 채널 ‘마이크스웨거 2’에서 한 랩 가사 중)

“나는 너의 용기야. 너는 더는 두려워 않아도 돼. 니가 느끼는 슬픔과 불안함은 모조리 다 내가 들이마셔 버릴 테니까 넌 마음 놔도 돼.” (지난달 29일 발표한 곡 ‘MA GIRLS’ 가사 중)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이 바닥의 제대로 된 여성 MC’ 선언으로 주목받고 있는 래퍼 슬릭(Sleeq·김령화·26)을 만났다. 그는 2012년 믹스테이프 ‘WEEKLY SLEEQ(위클리 슬릭)’으로 처음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고,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공연에 섭외됐다. 래퍼 제리케이의 제안으로 2013년 그의 레이블 ‘데이즈 얼라이브(DAZE ALIVE)’에 합류했다. 2013년 데뷔 싱글 Lightless와 Rap Tight(2014), Classism(2015), Energy/Python(2015), One and Only(2016) 등에 이어, 지난해 첫 정규앨범 ‘COLOSSUS’를 발표했다. 지난 1월엔 같은 레이블 소속 래퍼 던말릭과 함께 싱글 ‘Wonderland’ ‘이륙’, 믹스테이프 ‘FOMMY HILTIGER’를 공개했다. 2월엔 ‘한국 힙합 어워즈 2017’에서 ‘올해 과소평가된 앨범상’을 수상했다.

 

지난달 29일 발표한 싱글앨범 ‘MA GIRLS’ 자켓사진.
지난달 29일 발표한 싱글앨범 ‘MA GIRLS’ 자켓사진.

-‘원 앤 온리(One and Only)’가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노래였다면, 신곡 ‘마 걸스(MA GIRLS)’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같다. 어떤 생각을 갖고 노래를 만들게 됐나.

‘One and Only’는 켄드릭 라마의 ‘I’라는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고, ‘나를 사랑하자’는 의미로 만들었다. ‘MA GIRLS’는 내 얘기보다는 ‘너를 위해서 어떻게 할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위로받고 싶었고,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냥 ‘내가 하자’는 생각으로 만든 거다. 내가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은 사람이니까.

-한국 힙합음악 내 여성·성소수자 혐오가 심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시대착오적이다. 힙합 본토인 미국에서도 여성·성소수자 혐오발언을 자중하는 분위기다. 근데 한국 내에선 ‘다른 사람도 다 한다’는 이유만으로 쓰고 있다. 되게 둔하고 안일하다. 대중들의 인권 감수성은 점점 높아지고, 그 부분에 대한 요구가 까다로워지고 있다. (혐오문화가 지속된다면) 경쟁력에서도 뒤처질 거다. 힙합 커뮤니티 내에선 관련 이슈가 언급되긴 하지만 ‘아니, 이게 왜 문제야?’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친다.

-여성 래퍼로 활동하며 힘들었던 점이 있나.

래퍼로 활동하면서 여자라는 점을 신경 쓴 적은 없다. 예전에는 ‘동료가 부족해서 아쉽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남자 래퍼한테는 ‘남성 래퍼로 활동하면서 어땠느냐’는 질문은 안 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굳이 ‘여성’ 래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럼 아티스트로서 힘들었거나 보람을 느꼈던 적은.

내가 지향하는 예술·음악적 완성도에 미치지 못할 때 괴롭다. 아직 찾아가는 중이다. 내 음악을 듣고 ‘힘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네가 뭔데 뿌듯함을 느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마이크스웨거에서 ‘페미니스트’ 래퍼임을 밝히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다. 선언 이후와 지금, 변화된 게 있다면?

그 때보다 행복해졌다. ‘마이크스웨거’ 녹화 후 2주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녹화 내용과 상관없이 삶이 너무 우울했다. 이전까지의 정신상태를 돌이켜보면 나는 암울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안 한다. 많은 분들이 나를 좋아해주시니까 나도 나를 좋아하게 됐다.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기쁜 일이 생기면 행복해하는 시간이 늘었다.

-페미니스트 래퍼임을 밝힌 후 페미니즘 행사 섭외가 많다고 들었다. 일반 힙합 공연과 페미니즘 행사 공연은 분위기가 다를 것 같다.

일반 공연 관객들은 즐기러 온다는 느낌이라면, 페미니즘 행사는 연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불편함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리다보니까 다들 그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 후기도 다르다. 일반 공연은 ‘슬릭이 나왔더라, 라이브 재밌게 잘하더라’라면, 페미니즘 행사 공연은 ‘그런 노래를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라는 식이다.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게 된 계기는.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고서였다. 굉장히 충격이었다. 세상을 다 아는 줄 알았는데, 1도 몰랐다. ‘이렇게나 자명한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였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집에서 열등감이 많았고, 그게 피해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못나서 사랑을 못 받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가슴이 찡했다.

-가족 구성은 어떻게 되나. 가족 내 성차별을 겪은 적이 있나.

삼남매 중 둘째다. 마르고 예쁜 ‘연예인 같은’ 언니가 있고, 남동생이 있다. 어렸을 땐 그 사이에서 잉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인데 부러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커왔다. 사춘기 시절, 엄마가 나를 다른 형제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근데 크고 나선 그게 성차별임을 깨달았다.

-어머니에게도 페미니즘을 전파하나.

기회만 생길 때마다 말한다. 어머니가 드라마를 좋아하시는데, TV를 보고 계실 때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나오면 옆에서 엄청 잔소리를 한다. 그럼 조용히 텔레비전 끄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그래도 꾸준히 말하니까 어머니도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친구 분들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내가 했던 말을 한다고 하더라.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팬들이 질문을 보내왔다. 그 중 20대 여성분이 어머니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더라. 페미니즘을 접한 후 어머니와의 관계가 변화했는지 묻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페미니즘을 알려드리는 건 호의지, 책임은 아니다’라고 구분을 지으면 편해지지 않을까. 나는 어머니가 페미니즘을 하면 당신도 행복하고, 나도 너무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알려드리는 거다. ‘엄마가 페미니즘 해야 되는데’라는 강박에 얽매인 건 아니다. 어머니가 거부하면 이유가 어찌됐든 ‘엄마 생각은 엄마 생각일 뿐이니까’라고 인정한다. 애써 페미니즘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좀 외로워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얘기하면 되니까.

-‘슬릭의 노래와 행보에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나도 리스너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용기가 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라는 질문에 답한다면.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되고, 그냥 존재해주시면 된다. 이런 얘기 들으면 좋지만, 한편으론 자괴감이 든다. 난 다른 사람의 삶을 이어가게 해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책임감을 느낀다. 쉴 틈이 생겨 트위터를 하는 도중 성차별적 사건을 접하면 고민이 생긴다. 여기에 목소리를 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미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고, 힘들고,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모든 것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삶에 용기가 생겼다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책임 회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래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나.

관심사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올바른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다. 나도 사실은 ‘빻은’ 생각을 많이 한다. 내 안에 오래 전부터 고치지 못한 나쁜 생각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 왜 이렇게 못생겼지?’ 이런 것들. ‘외모가 다가 아니야, 사람은 내면이 아름다워야 돼.’ 머리로는 다 알지만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들을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두 번째는 ‘음악러’로서 세련된 음악을 하는 거다. 내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새롭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다. 두 가지가 인생의 목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