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루소 『에밀』에 대한 분노로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서 집필

“남자와 동등한 교육 시켜야”

 

경주마 달리던 경기장 뛰어들다

목숨 바쳐 얻은 여성선거권 투쟁

여성은 얼마나 더 피 흘려야 하나

 

영국의 참정권운동 시위.
영국의 참정권운동 시위.

현대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사람들은 흔히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를 먼저 꼽는다.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가장 급진적인 여성이며 ‘패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는 오명을 얻었던 그녀는 실제로 68혁명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책을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벌써 17년 전 일이지만, 서구 언론들이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으면서 그동안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로 제시하기도 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정작 딸과 혼동한 기자들에 의해 그림(사진은 없던 시절)이 잘못 실리는 수모를 겪었다.

딸인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1818) 저자로 영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 1968년 이전에는 그녀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로 알려져 있었다. 엄마와 딸의 이름이 같은 이유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윌리엄 고드윈이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아내를 기리기 위해 딸에게 아내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페미니스트로서의 위상을 차지한 엄마에게는 남편의 성이 붙지 않은 이름이 남았고, 반면 엄마가 이름을 찾자 딸은 학자들이 편의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고 미들 네임을 생략해서 부른다.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을 위해 그다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없다. 특별한 캠페인이나 행동을 취한 것도, 조직을 결성한 적도 없거니와 단지 그녀가 “여자는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외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말 영국에서 이러한 주장은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다.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서’(Feminist Manifesto)로 알려진『여성의 권리 옹호』(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는 울스턴크래프트가 6주 만에 완성한 소책자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남녀 불평등은 여자가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양육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영국에서 여성은 배울 수 없었고 당연히 글을 쓸 수도 없었으며 책을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사회 인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여자에게는 늘 바늘이 주어졌다. 혹시 여성이 책을 읽더라도 책 표지에 바늘을 꿰어 넣어 여성의 ‘본분’을 잊지 않게 했던 시절에, 그녀는 여성 억압의 근원과 문제 해결책으로 여성의 교육을 요구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익명으로 출간됐는데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책의 유명세에 따라 2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있었는데, 이 책은 사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루소의『에밀』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루소는 에밀을 위한 여자아이로 소피를 등장시켰을 뿐, 그녀의 교육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여자는 단지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존재이며 평생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에 대해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자아이에게서 인형을 치워라”고 응수했다. 여성이 독립적인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거의 100년 뒤에나 나올 버지니아 울프의『자기만의 방』과『3기니』의 전조였다.

 

군중을 상대로 연설 중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군중을 상대로 연설 중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블루스타킹 서클’ 만든 지식인 여성들

영국에서 울스톤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언제나 그렇듯 선조들이 존재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당대 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본분을 잊은 여성이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았으며, 여러 남자와 연애를 했고,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옹호한 급진적인 사상가이자 여성의 권리마저 요구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배운 여성이면서, 즉 똑똑한 여성이어도 여성의 의무를 잊지 않고 조용히 가정을 지키며, 바느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쓰는 여성들이 있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여성들, 그들이 바로 블루스타킹 서클(Bluestocking Circle)이었다.

블루스타킹들은 18세기 ‘영국의 뮤즈’로 불리며, 여성들이 배운다고 해서 위험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당대의 ‘우아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들의 펜을 통해 조용히 주장하고 있었다.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출신의 몇몇 여성들이 사치와 치장에 매몰되지 않고 문학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은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는 여성들이 태반일 때도, 글 쓰는 재능을 썩히는 하류층 여성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문인으로 데뷔시키는 일을 했다. ‘블루의 여왕’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몬태규(1718∼1800)를 비롯한 지식인 여성들은 스스로 책을 출판하고, ‘어려운’ 고전을 번역하며 문예지를 만들어 비평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귀족 여성들이 바느질이나 정원 가꾸기를 주제로 삼는 차 모임을 열 때, 그들은 자신의 거실에 지식인들을 모아 문학을 토론하고 비평하며 지식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한 세대 정도 차이나는 이들을 ‘한가한’ 여성들이라 비난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부유하고 한가한’ 상황과 사회 명사들과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여성의 글 쓸 권리를 확보하는 데 힘썼다. 그들이 비록 여성의 의무가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라는 시대의 담론에 바로 저항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여성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들은 직접적인 캠페인을 전개하지도, 일반 여성의 선거권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중반의 선거권자들보다 그 영향력이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울스턴크래프트가 급진적인 여성으로 외면 받는 와중에도『여성의 권리 옹호』가 널리 읽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의 지적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1차 페미니즘의 물결

영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이들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주장한 19세기 여성선거권 투쟁가들이었다. 여성선거권 운동을 ‘1차 페미니즘의 물결’이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여성의 선거권은 모든 여성에게 호소할 수 있는-물론 여성들 스스로가 거부하기도 했다-가장 핵심적이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적인 주제였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들을 ‘서프러지스트’(suffragist)와 ‘서프러제트’(suffragette)로 구분하는데, 후자는 공공장소에서 남성의 연설을 방해하거나 유리창을 깨며 과격한 행동을 한 이들을 일컫는다.

2016년 개봉한 ‘서프러제트’는 메릴 스트립이 여성 참정권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로,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지 5세가 참가한 엡섬 더비 경마 경기에 뛰어들어 사망한 에밀리 데이비슨(1872∼1913)을 그려내 이들의 운동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그에 비해 선거권 운동이 일반인들에게는 얼마나 외면당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이처럼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정작 영국은 여느 유럽 나라들보다 보통선거권이 늦게 인정됐다.

여성 선거권자들의 고된 열매는 그러나 매우 썼다. 여러 여성들이 투옥되고 얻어맞고 단식 투쟁을 강제로 중단당하며, 심지어 목숨을 바쳐 선거권을 획득해도 사회는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여성 선거권은 그야말로 상징적인 성과에 불과했던 것이다.

 

에밀리 데이비슨
에밀리 데이비슨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실질적 평등’이 필요했다. 소위 68혁명의 시기가 되어서야 여성운동은 ‘제 2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운동은 지식인 중심, 백인 중심의 게다가 상류층 중심의 여성 운동이라 여성 전체를 대변할 수 없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적어도 법률적인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들이 요구한 기회의 평등이나 참정권 요구는, 즉 여성운동을 주도한 1·2세대들의 업적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지금은 당연한 그리고 의무이기도 한 여성의 교육권이나 선거권은 당대에는 프레임을 부숴야만 하는, 또 편견과 무지를 깨어야 하는 하나의 도전이었고, 알다시피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들게 투쟁해서 얻어낸 여성의 권리는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위협받고 있다.

이전의 교육권이나 선거권처럼 100년쯤 흐른 뒤에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일 피임이나 출산, 심지어 결혼이 여성의 선택일 수 있다는 ‘상식’이 지금 여기서는 여전히 여성의 ‘고유’ 업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가? 얼마나 많은 여성이 또 피를 흘려야 하는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는 당연한 명제를 왜 여성들은 늘 자기 검열을 통해 또는 ‘페미나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나치 같은 여성들-라는 오명을 써가며 요구해야 하는가? 왜 여성의 역사는 늘 반복되는가?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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