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한/한국문화복지협의회장, 문화비전 2000위원

SF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대표작 <화씨 451>은 꽤 알려진 미래형 소설이다. 책이 금지된 전체주의적 사회시스템을 그린 이 작품은 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 책을 불사르는 일을 하는 방화수(소방수가 아니다)가 주인공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월의 <1984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명비판적 미래 묵시록으로 평가되는데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책의 종말이 예견되는 요즘 더 자주 기억되는 계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나도 지난 주말 한번 더 읽었다. 읽다가 혼자서 즐기기가 아까워 이 글에 좀 옮겨 보기로 했다.

방화소 소장이 방화수에게 위로하는 태도로 이런 설명을 하는 장면이 있다.

<지난시대를 영사기로 돌린다고 상상해 보게. 19세기에는 사람과 말과 개와 짐마차가 느릿느릿 꾸물거렸지. 20세기엔 좀 더 빨라지지. 책들도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지. 요약, 압축, 다이제스트판, 타블로이드판, 그리고 내용들도 죄다 말장난 비슷하게 가볍고 손쉬운 것들로 변해 갔지. 고전들이 15분짜리 라디오 단막극으로 마구 압축되어 각색되고 다시 2분짜리 짤막한 소개말로, 결국에는 열에서 열두줄 정도로 말라비틀어져 백과사전 한 귀퉁이로 쫓겨났지>

<영사기를 더 빨리 돌려보게. 찰칵, 그림, 시선, 눈, 지금, 철컥, 여기, 거기, 빨리, 질주, 위로, 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왜, 어떻게, 누가, 뭘, 어디서, 오, 펑, 휙휙, 철썩, 핑, 퐁, 줄여줄여, 짧게짧게, 간단간단, 정치? 한줄, 두문장, 됐어, 머릿기사, 끝! 그리고는 허공으로 죄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학교교육도 단순해져 갔지. 규율은 느슨해지고 철학과 언어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영어의 철자법은 갈수록 변질되어 갔지. 마침내 모든것이 완벽하게 탈바꿈했네. 인생은 말초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후딱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지. 단추만 누르면, 스위치만 잡아당기면, 나사만 조이면 그만인데 그밖에 뭘 더 배우고 일을 한단 말야?>

이렇게 되서 결국 사람들은 책이라면 질색을 하게 됐다는 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이 글이 바로 지금 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놀랍게도 1950년에 발표됐다.

그때는 PC도 없었고 인터넷이 탄생하리라는 전망도 불가능했고, 더더욱 인쇄매체의 종언을 상상한다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러나 여기에 레이 브래드버리의 혜안을 상찬하기 위해 이렇게 긴 인용을 한 것은 아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실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진실로 너무 가볍게, 너무 쉽게 적당히 후딱후딱 간단간단 한줄이나 두줄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책이라는 매체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식과 행위 모두에서도 구호 하나 제목 한줄로 한순간씩 떴다 사라지는 형식으로 흐트러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또 거창하게 이야기를 확대할 생각은 없다. 다시 얌전하게 책의 영역으로 되돌아온다면, 귀찮지만 근일 서점에 한번 들러 책의 제목들을 훑어 봐 주기를 부탁한다.

이제는 정말 대형서점에서도 매장 중앙에서는 고전이라고 하는 것, 교양서적이라고 말하는 것, 더 쉽게 표현해서 한권 사서 볼 만하다고 할 쓸 만한 책들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가볍게 짧게짧게 책이라는 이름만 있는 책들이 낭자하게 펼쳐져 있다. 신문도 TV도 재미있는 잡담의 마당이 되었고, 누구도 진지한 사고와 그 깊이를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지금 책을 불태우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 그리고 그 무게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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