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다.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준비 없는 노후에 직면한 사람들. 50~60대 중장년층은 이미 은퇴세대다. 부모 봉양에 자신의 노후 준비까지 앞길이 캄캄하다. 돈이 있다고 무조건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이한세 박사의 시니어스토리’는 필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실버 세대에게 필요한 생활정보, 요양병원, 실버타운 등의 ‘꿀팁’ 정보를 전해준다. [편집자 주]

이한세 박사의 시니어 스토리

황후의 냉동고, 걸인의 냉장고 

 

1978년에 발표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수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거르고 출근을 했다. 아내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그대신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만 놓인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남편이 상위에 남긴 쪽지 “황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살림이 그리 넉넉지 않았지만, 오손도손 서로 도와가며 살았던 1970년대 어느 부부의 실화라고 한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 부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장성한 자녀들은 있지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부인만 혼자 남아 있다면 ‘황후의 냉동고, 걸인의 냉장고’로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대구에 친정을 둔 대학 여자후배가 있다. 후배의 친정엄마는 70대 후반이다. 대구 친정집은 큰 평수의 아파트에 냉장고뿐만 아니라 따로 냉동고도 있을 정도로 식재료 관리도 잘 하신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후배는 대구에 가게 돼 연락 없이 불쑥 친정엄마 집에 들렀다. 친정엄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 어지럼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갔는데 영양실조 진단이 나왔다면서 계면쩍게 웃었다고 한다. 

명절 때마다 친정엄마 집에 가는 후배는 갈 때마다 갈비, 굴비, 사골 등 나름대로 비싸고 좋은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갔다. 친정엄마 해 드시라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이 정도면 다음 명절 때까지 어느 정도 드실 수 있겠지 하고 흐뭇해 하곤 했다. 혼자 생활하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안쓰러워 외식도 하라고 매월 적지 않은 용돈도 드리고 있다.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냉장고를 열어본 후배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와 식은 된장찌개, 이름 모를 나물 무침과 보리차가 전부였다. 전기밥솥 안에도 한지 오래된 밥이 누렇게 색이 변해 밥솥 안에 마른 밥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냉동고를 열어보니 지난 명절 때 엄마 드시라고 차곡차곡 쌓아 놓은 갈비, 굴비, 사골이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혼자되신 노인들은 냉동고에서 갈비 꺼내 해동시키고 사골 끓이고 하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시간도 많이 걸려 좀처럼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진수성찬을 차린다 한들 같이 먹을 사람도 없기에 오히려 더 적적할 수 있다. 밖에 나가 자주 외식이라도 좀 하시라고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여 드려도 혼자서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처럼 처량한 것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자녀들이 용돈을 많이 드려도 외롭다. 음식 하기도 귀찮다. 함께 먹을 사람도 없으니 대충 끼니를 때우게 된다. 자연스럽게 만성 영양부족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작년 친정엄마 집 방문 이후부터 후배는 생각을 바꿨다. 냉동해야 하는 갈비나 혼자 조리해 드시기 어려운 식품보다는 단백질 위주로 오랫동안 간편하게 드실 수 있는 것을 준비해드린다. 계란장조림, 명태조림 등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냉동고 안의 떡과 만두 등을 1인분씩 소포장해 손쉽게 전자레인지로 데우기만 하면 바로 드실 수 있도록 했다. 유제품 섭취를 위해 소화가 잘 되는 요구르트와 저지방 아이스크림도 잊지 않았다. 하루 필요한 양만큼 포장된 견과류 세트도 준비해 드렸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도시락 집에 전화를 하여 배달을 시켜 드리기도 하고 사과와 같은 과일은 산지 배송으로 친정엄마 댁으로 보내드리고 있다. 

이렇게 식단을 준비해 드리고 석 달 후 명절 때 가보니 100봉지 견과류 세트를 거의 다 드셨다. 아침은 거르지 않고 간단히 떡을 데워서 사과와 함께 먹었고 후식으로는 요구르트도 챙겼다. 얼굴이 한결 더 환해지고 기력이 좋아진 친정엄마를 보며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지고 간 떡과 만두를 1인분씩 포장하여 냉동고에 정리해 두고 여러가지 곡물이 섞인 두유와 오곡 햅반을 선반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후배의 손놀림도 경쾌해 졌다.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단이야 말로 부모 건강의 지름길이다. 용돈을 넉넉히 드리거나,비싼 식재료를 많이 사드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쉽게 혼자서 드실 수 있도록 식단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부모가 홀로 지내고 있다면 집을 방문했을 때 냉장고부터 확인해 보자. ‘걸인의 냉장고’라면 ‘황후의 냉장고’로 바꾸어 드리자. 

*이한세 박사의 시니어 스토리는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이한세 박사는... 

1994년 서부호주국립대 생명공학과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1995년 주한호주대사관 상무관을 역임했다. 그 후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호주의 사회와 문화’를 가르쳤으며, 2002년 글로벌 리서치 기관인 스파이어 리서치 & 컨설팅사의 한국지사를 설립해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15년간 리서치회사 대표를 역임하면서 노인복지관련 연구를 통해 전문성을 입증 받고 다수의 리서치 보고서를 작성했다. 2014년에는 전국의 실버타운 전수조사를 통해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 양로원 간 친정엄마’ 책자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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