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타고 #OO계_내_성폭력에 대한 무수한 고발과 분노, 사과와 자성이 이어진 후 수개월이 흘렀습니다. 빠르게 밀려와 사라지는 SNS상의 언어들처럼 많은 이들의 용감한 말하기도 조금씩 잊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변화했을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자 분투하고 있을까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각계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편집자주>

계속되는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말하기 - 2

 

2016년 9월 2일 『21세기문학』 가을호에 시인 김현의 「질문 있습니다」가 발표되었다. 남학교와 군대 등 한국의 남초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 내에서 위계폭력과 여성혐오를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하는지, 그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규정된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소수자를 어떤 방식으로 여성화하며 성폭력을 가하는지, 나아가 그런 집단에서 폭력을 학습한 남성들은 가정에서 여성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고발하는 글이었다. 거시적 관점의 사회 분석이 아니었다. 모두 고유한 체험에서 비롯된 증언이었다. 김현의 비판은 “어디서 뭘 보고 배워서 저렇게” 됐는지 모를 “XX 새끼들”이 문학계에서도 여성 문인들을 대상으로 그런 폭력을 자행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2016년 9월 26일 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에 소설가 천희란의 「가장 잔혹한 말」이 발표되었다. 김현의 고발에 화답하며 그것이 열어젖힌 사유와 실천의 방향을 여성의 입장에서 치밀하게 증폭시키는 글이었다. 천희란은 남성지배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부당한 폭력을 겪고 되새기며 분열적 주체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고 성찰한다. 천희란은 문학계의 경우 남성 문인들의 성범죄에 여성 문인들뿐만 아니라 여성 습작생들도 취약하게 희생되어왔음을 증언하면서, 고통의 기억으로 “끝없이 분열하는 자신과 싸워온 사람들 모두”의 연대를 제안한다.

그 사이에 『한겨레신문』에 자신이 만난 여성들에 대한 과오를 자백하는 모 남성 문인의 서한체 반성문이 실렸다. 명목이 반성이지 실상은 자기 연민으로 과밀한 파렴치한 글이었다. 그의 범죄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SNS에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왔다. 다른 남성 문인들의 성폭력에 대한 증언들도 거듭 이어졌다. 사적인 관계와 장소는 물론이고 문학 교습을 빌미로 공교육 기관에서 미성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까지 폭력이 자행되어왔음이 드러났다.

모든 것이 인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발점을 확정하고 단선적 연대기를 구성하려는 노력은 근원적으로는 효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모멘트를 복기하는 까닭은 문학출판계의 성폭력과 위계폭력에 반대하는 특정 목적을 지향하는 연대 운동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발한 목소리들과 확산된 감정들 덕분에 비로소 가시적으로 촉발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페미라이터는 “폭력과 혐오에 맞설 의지를 가진 사람이자 피해생존자들과 연대하는 모두의 이름”으로서 2016년 10월 31일 첫 모임을 가졌고,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과 연대하고, 「문학출판계 성폭력 위계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서약」을 진행하는 것으로 행보를 시작했다. 계간지 『문예중앙』과 『문학과사회』는 SNS의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이 발발하기 전에 각각 “문학계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2016년 겨울호 특집 주제로 정했었는데, 편집위원들과 필자들은 실시간으로 급박하게 진행되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원고의 내용과 방향성을 계속 수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격월간지 『더 멀리』는 애초에 분명하게 “문단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폭력 사례와 기성 문인으로부터 혐오 폭력을 당한 바 있는 습작생들의 목소리” 모으기를 11호 기획 의제로 삼았다.

2017년 1월 SNS 상의 #문단_내_성폭력 고발이 다소간 잠잠해진 현시점에서, 문학출판계 성폭력과 위계폭력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출간된 문예지들을 읽고 트윗으로 공유하면서 중요한 증언, 결의,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다. 겪은 것을 스스로 말하고 쓰는 여성들이 있고, 그 말과 글을 적극적으로 듣고 읽는 여성들이 있다. 우리라고 말하는 데 거리끼지 않겠다. 우리는 서로의 현존을 확인하고 신뢰하며,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문학적 행위를 실천하며, 그럼으로써 문학적으로 연대한다.

문예지들에 실린 각각의 텍스트는 필자, 어조, 관점, 문체, 입장 등은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강력히 지향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놀라울 만큼 공통적이다. 우리의 지향은 문학, 공동체, 미래라는 공통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각종 연대 조직 결성, 지속적인 증언과 경청, 텍스트 출간, 공청회와 집담회 개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전담 상설기구 설치 등 가능한 활동들을 통해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가해자의 징계와 처벌이라는 사법적 정의 구현과는 다른 차원에서, 문학 공동체의 미래를 새로 상상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묵인한 기존의 조건들을 하나씩 해체함으로써 그 상상을 실현해나가는 일이다. 문단이 남성과 여성, 기성 문인과 습작인, 선생과 학생, 선배와 후배 등 권력을 불평등하게 배분하는 차이의 체계에서 유지되어 왔음을 반성하고 다시금 비판하며, 이 체계의 소수자들이 더 이상 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서로의 문학적 열망을 펼쳐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다른 한 명의 페미라이터는 말한다. 물러설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을 사람들이 있음을 느끼고, 우리는 여럿이고, 여럿이 함께 갈 것이다. 끈질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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