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첫째주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여성학과 젠더 분야 도서 베스트셀러 중에는 표지가 분홍빛인 책들이 여럿 포함됐다.
1월 첫째주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여성학과 젠더 분야 도서 베스트셀러 중에는 표지가 분홍빛인 책들이 여럿 포함됐다.

여성학·젠더 도서 표지 속 눈에 띄는 ‘분홍색’ 왜일까

“거의 다 핑크네?” 최근 대형서점에서 간 대학생 이지영(25)씨는 서가를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페미니즘 도서를 포함해 ‘여성’ 관련 도서의 대부분은 “표지가 온통 분홍색”이었다. “우연 같진 않아요. ‘여자라면 분홍색’이라는 고정관념이 표지 디자인에 반영된 게 아닐까요?” 같은 날 서점을 찾은 프리랜서 번역가 김모(34) 씨도 동의했다. “여성학·젠더 서가 자체가 분홍빛이죠. 페미니즘 열풍이 불어도 출판계의 젠더 편견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평소 페미니즘 도서를 탐독하는 정지민(25·이화여대 여성학 석사과정) 씨의 생각도 비슷했다. “페미니즘이라는, ‘센’ 주제를 다루는 책이니까 표지만이라도 ‘공격적이지 않은’ 분홍색으로 꾸며서 독자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 한 게 아닐까요?”

‘왜 여성학·젠더 분야 도서 표지는 대부분 분홍색인가’. 독자들의 의문은 지난해부터 이어졌다. 1월7일 현재 온라인서점 ‘알라딘’ 여성학과 젠더 분야 도서 베스트셀러 10위 중 6권은 표지가 분홍색이거나, 눈에 띄는 분홍색 디자인 요소를 표지에 삽입했다. 번역서의 경우, 해외에서 출간된 원서의 표지 디자인과 비교해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왜일까. 

 

번역서와 원서의 표지 디자인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번역서와 원서의 표지 디자인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출판사마다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배드 걸 굿 걸』(2016)을 펴낸 글항아리 관계자는 “담당자가 퇴사해 자세한 디자인 의도는 밝히기 어렵다”면서도 “독자들의 지적을 받아들여 향후 여성학이나 젠더 분야 도서의 표지 디자인에는 분홍색을 쓰지 않으려 한다”고 밝혔다.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고자 분홍색 표지를 택한 곳도 있다. 『나쁜 페미니스트』(2016)를 펴낸 사이행성의 김윤경 대표는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분홍색을 좋아한다’, 즉 ‘페미니즘은 복수 명사이며 그 안에 다양한 페미니즘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저자 록산 게이의 말을 표지 디자인에 그대로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분홍색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해 비틀어 보고자 한 표지 디자인도 있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2016),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2016)를 펴낸 창비 교양출판부의 최지수 편집자는 각각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부여된 ‘분홍색’의 드레스를 구김으로써 제목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으며, “분홍색 W(여성)와 하늘색 M(남성) 문양을 위아래에 뒤집어 배치함으로써 젠더 정체성을 뒤집어 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아내가뭄』(2016)을 펴낸 동양북스의 박지호 편집팀장은 “분홍색 표지가 예뻐서 그것으로 정했을 뿐 ‘여성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며 “페미니즘 도서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분홍색 같은) 파스텔 색상을 표지 디자인에 활용하는 게 요즘 트렌드”라고 했다. 색채 전문기업 팬톤이 선정해 유행한 2016년의 색 ‘로즈쿼츠(Rose Quartz)’도 분홍색 계열이었으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편집자는 “사실 표지 디자인을 할 때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의도적으로 조정하고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분홍색 표지는) 어느 정도 편집자와 디자이너 개인의 젠더 관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봤다.

이 편집자는 “업계에서는 이런 문제제기가 나온 이후로 독자들의 반응을 주시하며 디테일을 제대로 챙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페미니즘 관련 신간 표지들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다. 페미니즘이 가져온 작지만 큰 변화가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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