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삽질할 때

사람들은 그냥 욕했을 뿐

‘미스터 리’라고 안 불러

 

왜 박근혜 대통령에겐

‘미스 박’ 호칭 썼나

‘사소한 표현’이 삶을 규정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를 풍자한 여성혐오 패러디물.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를 풍자한 여성혐오 패러디물.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우연히 스마트폰을 뒤지다 ‘승기야’님이 쓴 글을 보게 됐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은 이유는 “전 여잔데도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글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승기야님이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촛불집회 때 DJ DOC의 ‘미스 박’이란 표현을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자인데 페미니스트 싫어요”

“왜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에 꼬투리 잡듯 따지고 들어서, 남녀간의 분란을 조장해서 서로 의미 없는 감정 싸움만 하는 걸까요? 페미니스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뭔가요?”

승기야님의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촛불집회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DJ DOC는 그 행사를 더 빛나게 할 목적으로 노래를 만들었지요. 그 과정에서 쓴 ‘미스 박’이라는 표현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촛불집회의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들의 지적에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단체도 스스로 욕먹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미스 박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이왕이면 승기야님이 그들이 왜 그랬는 지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 주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그건 승기야님이 올해 스무살이 되고, 앞으로 많은 시간을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승기야님은 ‘사소한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삶을 규정짓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큰 싸움이 되는 경험, 해보신 적 있으시지요? 표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폭탄이 잘못 날아가 민간인이 죽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그런 사건을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대로 ’민간인 몰살‘이라고 한다면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날까봐 그런 것이지요.

승기야님이 태어나기 전인 1990년대 얘기를 해볼게요. 여성이 25세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노처녀라 부르고, 그 여성이 기분이 안 좋기라도 하면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진단이 내려지던 그 시기, 직장에 다니는 여성은 직종에 관계없이 ‘미스X'으로 불렸습니다. 남성들이 김 대리, 김 차장, 김 부장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여성은 늘 ‘미스X’이었습니다.

여성은 어떤 직종에 있어도 그냥 여성일 뿐이라는 얘기지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회사에서 여성들은 ‘미스’라는 칭호와 더불어 여성이 으레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 즉 커피타기, 청소하기, 화초에 물주기 등등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미스 박 얘기로 돌아가 보죠.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삽질을 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 대통령을 그냥 욕했을 뿐 그를 ‘미스터 리’라고 부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미스 박’이라는 호칭을 써야 할까요?

물론 박 대통령이 불리할 때마다 여성이란 장막 뒤에 숨으려는 나쁜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박씨 여성들을 폄하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승기야님은 이런 주장도 하십니다.

“남녀가 화합해서 사회의 차별적인 제도 개선 그리고 차별받는 자들을 위한 제도적 배려가 우선 아닌가요? 남성분들은 육아나 가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제도적 보완을 함께 촉구하고.”

여성이라는 굴레

말은 좋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여자분들이 아무리 타일러도 남성이 육아나 가사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지요. 그래서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남성분들 중에는 이런 폭력성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밑에 달린 댓글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에서 페미나치들이 여성운동의 헤게모니를 잡아서 난장판된 것일 뿐 페미니즘 운동 자체는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즉 페미니즘은 좋은 운동이지만,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이 주장은 거의 모든 운동에서 변주된 레퍼토리입니다.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시절,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외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전경을 동원해 그들을 막았습니다. 눈도 못뜰 만큼 독한 최루탄을 쏴댔습니다. 거기에 맞서기 위해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시위의 대의는 좋지만, 폭력은 옳지 않아.” 이 세상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권리는 없고, 약자일수록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한국남성들이 동경하는 미국에서도 여성들은 참정권과 낙태의 권리 등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얻기 위해 무수한 싸움을 해야 했답니다.

승기야님은 다행히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감하고 계십니다. “법원에서 일하는 엄마나 백화점에서 회계 보는 언니 말만 들어도 사회 내에서 여성이 은근히 차별받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아요. 이건 분명히 개선해야 할 점이고.”

승기야님의 언니와 어머니가 여성차별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남성문화가 지배하는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여성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승기야님이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지금이야 승기야님은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젊은 여성이니까요. 게다가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여성이라니, 남성들이 더 환호할 것 같네요. 하지만 승기야님이 일자리를 얻고 승진을 위해 남성과 경쟁할 때쯤 승기야님은 여성이라는 굴레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승기야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은 동료남성이 아닌, 페미니스트들입니다.

2016년은 페미니즘의 물결이 뜨거웠던 한해였습니다. 페미니즘 책이 그렇게 화제가 된 적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글을 보니 승기야님이 페미니즘을 너무 막연하게 이해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아쉬웠습니다. 혹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몇 권이라도 읽어보시면 어떨지요? 뭔가를 제대로 아는 방법엔 책만한 게 없고, 그 책들을 읽는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님의 시각이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승기야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님의 화려한 스무살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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