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성신문 신년기획 - 눈치 주는 사회 - 2]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개인 의견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눈치문화’. 법 위에 ‘사내눈치법’이 존재하고 ‘눈치 생존술’을 권하는 사회에선 상식과 합리성은 발붙일 곳이 없다. 여성신문은 2017년 신년기획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는 눈치 문화를 점검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함께 모색해본다.

“당연한 권리인데… 윗선서 자꾸 눈치 줘”

 

지난달 중순 최형민 씨의 직장 공지 게시판에 붙은 연차휴가 사용 관련 공지. ⓒ최형민 씨 제공
지난달 중순 최형민 씨의 직장 공지 게시판에 붙은 연차휴가 사용 관련 공지. ⓒ최형민 씨 제공

2015년 모 중견기업에 입사한 최형민(29) 씨의 새해 목표는 ‘연차휴가를 마음대로 사용 가능한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최씨의 직장에서 3년 차 미만의 직원이 금요일에 연차휴가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꼭 사용하려면 “A4 용지 1장을 꽉 채워 쓴 사유서를 제출해서 상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사유 심사’도 까다롭다. “‘개인 사유’ ‘휴식’이라고 썼다가 상사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생리통’도 안 된대요. 주어진 휴일 수만큼 알아서 쉬겠다는데 왜 회사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놀러 가려고’, ‘쉬고 싶어서’ 연차를 쓰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운 시기인데... 다 연봉 협상에 반영된다는 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송보영(35)씨가 다니는 회사의 부장이 최근 전체 조회 시간에 한 말이다. 송 씨는 “연차 휴가 사용은 당연한 권리인데 윗선에서 자꾸 눈치를 준다. 한 직원이 연차 신청 사유를 ‘재충전’이라고 써서 제출했는데, 휴가 전날 급한 일이 생기자 상사에게 휴가 취소 압박을 받기도 했다. 그 뒤로는 다들 휴가 사유를 ‘건강상의 이유’로만 적어서 낸다”고 말했다.

법으로 보장된 연차휴가지만 내 마음대로 쓰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지닌 불만일 것이다. 휴가 신청 시 사유를 적도록 하는 것은 대표적인 ‘사내 눈치법’이다. 전경련 등 경제5단체가 지난해 6월 직장인 5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10명 중 3명(31.7%)은 휴가사유를 실제와 다르게 적어낸 경험이 있었다. 54.2%가 “휴가사유를 기재하지 않는 것이 휴가이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쉬고 싶다’는 적절한 사유가 안 돼. 그런 이유로 연차를 썼다가는 나중에 연봉 깎여.” 직장인 김현무(32)씨가 최근 상사에게 들은 ‘조언’이다. “다 못 쓴 연차도 소진할 겸 연말에 며칠만 쉬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부적절한 휴가 사유’라고 하니까 기운이 빠지더라고요. 연차휴가 사유와 근무 태도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워커홀릭을 숭배하긴 하지만, 적당히 충전할 시간을 줘야 직원들도 업무 효율이 오르죠.”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어쩌다 ‘성실함의 척도’가 됐을까. 근면과 성실을 미덕 삼아 단기간에 압축적 성장을 이뤄낸 산업화 시기의 경험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각인돼 있다는 방증이다. 야근을 일삼고, 휴가마저 반납하며 일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가 노동현장에 뿌리내렸다.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두 번째로 길다. ‘OECD 2016 고용동향’을 보면 한국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2015년 기준)으로, OECD 34개 회원국 평균(1766시간)보단 347시간 더 길다. 347시간을 하루 법정 노동시간(8시간)으로 나누면, 한국 노동자들은 OECD 평균보다 43일 더 일한 셈이다. 그러나 시간당 실질임금은 OECD 평균(23.36달러)의 67%(15.67달러)에 불과하다. 한국생산성본부의 ‘2015 OECD 회원국 시간당 노동생산성 비교’를 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013년 기준 25위로 하위권이다. 휴가도 제대로 못 쓰고 일터에 오래 머무르지만, 지갑은 두둑해지지 않고 생산성만 떨어지는 셈이다. 

 

서울 서초구의 (주)우아한형제들 사무실 벽에는 휴가에는 사유가 없습니다 퇴근할 때 인사하지 않습니다 등의 사훈이 붙어 있다.
서울 서초구의 (주)우아한형제들 사무실 벽에는 '휴가에는 사유가 없습니다' '퇴근할 때 인사하지 않습니다' 등의 사훈이 붙어 있다. ⓒ우아한형제들

쉬러 간다는데 눈치를 주고 ‘사유’를 요구하는 직장문화를 바꾸는 일은 기업 경쟁력 향상의 발판이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6월30일부터 관계부처, 전경련 등 경제5단체 등과 함께 ‘휴가사유 없애기’ 캠페인을 벌인 배경이다. ‘일·가정 양립 조직문화 만들기’ 민관공동 캠페인의 하나로, 휴가를 마음대로 가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일·가정 양립을 실현하자는 취지다. 현장의 변화도 늘고 있다. KT&G는 지난해부터 휴가 신청 시 이유를 묻는 ‘사유 기입란’을 없앴다. 연차휴가는 상부의 결재 없이도 쓸 수 있게 됐다. 휴가 시스템에 원하는 날짜만 입력하면 자동으로 상사에게 ‘통보’된다. 배달 애플리케이션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원칙적으로 직원들에게 휴가 사유를 묻지 않는다. 

노동현장에선 휴가 사유를 묻지 않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 동료들의 업무 부담 증가까지 모두 고려해야 노동자들이 죄책감 없이 편히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보영 씨는 “영업직, 교대 근무를 하는 생산직이나 전문직의 경우 이런 이유로 쉽게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휴가자를 대체할 전문 인력까지 지원한다면 누구나 휴가를 편히 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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