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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동지역에서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았다.

이제까지 중동지역 국가들은 우리에게 항상 먼 나라였다. 우리가 그

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회교, 테러, 전쟁, 그리고 한국 대기업들의

건설 현장 등 단편적인 조각들뿐이다. 지난 20여년동안 그들이 과거

로 회귀하고 있을 때, 서구에 대해 문을 더욱 꼭꼭 걸어 잠그고 있

을 때, 모든 서양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전통만을 강요하는 국수주

의로 온 나라가 들끓을 때, 민족주의라는 포장 하에 인권이 짓밟히

고 있을 때조차 이들은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안에서의 여성의 삶이란 어쩌면 중동을 경험하고 온 남성들의 우

스개 잡담거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그곳의 여성들에 대해 주목한다면 결코 잡담거리가 될 수 없는 삶이

바로 중동 여성들의 삶이다.

여성능력 비하로 기술·법학 선택 못해

이란의 한 중산층 여성이 독일의 여성운동단체에 소개한 그들의 삶

은 이란 여성들의 매일의 생활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란에서는 아이의 출산시 아버지에게 그 아이의 탄생을 제일 먼저

알리는 사람에게 보상을 하는 관습이 있다. 이때 남자아이의 경우

더 후한 상금을 받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구에서의 여자아이에

대한 교육은 생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경제사정이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소녀들은 종종 학교에 가지 않고 집안일과 형제 돌보

는 일만을 배운다. 그들의 부모는 노년에 딸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믿거나, 혹은 소녀들을 외부에 내보냈다가 이성교제

를 하는 등 도덕적으로 ‘나쁜 물’이 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다.

호메이니의 집권 이래로 소녀소년들의 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분리되

어 있고 소녀들은 다시

학교에서 ‘차도르’(이것은 눈썹, 턱, 볼까지 완전히 덮으며 가슴까

지 내려온다)를 써야만 한다. 남교사는 여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소녀들은 소년들보다 능력이

뒤떨어져 어렵고 힘든 일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란의 소녀

들은 기술고등학교에 갈 수가 없다.

대학은 교수진이 적은 관계로 남녀가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강의실에 여대생자리와 남대생 자리간에 두꺼운 커튼

이 쳐져있기도 하다. 커튼이 없다하더라도 강의실 한쪽에는 여학생

이, 다른 한쪽에는 남학생이 앉도록 되어있으며 여학생 의자에 남학

생이 앉을 수 없다. 전공선택에 있어서 여학생은 공정한 판단을 내

리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법과를 선택할 수 없다.

6세부터 남녀칠세부동석 발각시 부모 대신 처벌

이미 6세때부터 남자어린이와 여자어린이가 공원이나 길에서 노는

것은 금지된다. 만약 코미타(일종의 경찰감시원)에게 발각되면 이 어

린이들은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고 며칠 후에 경고와 함께 부모에게

넘겨진다.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가족내의 미혼녀는

결혼할 때까지 이성교제가 금지된다. 심지어 결혼약속때까지 신부가

신랑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결혼은 아버지의 승낙 하에서만 이루어지는데, 만약 아버지가 사망

했으면 할아버지(부계) 혹은 아버지의 남자형제의 허락이 필요하다.

여성의 이혼은 남편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

의 동의 없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

남성들은 4명의 정식 아내를 가질 수 있고 일시적으로는 많은 여성

또한 허용된다. 정식 아내가 아닌 이 여성들을 ‘시가(Sigha) 여

자’라고 별칭 하는데 남성들은 이들을 짧게 혹은 길게 데리고 살

수 있다. 이들이 정식 아내와 다른 점은 남성이 죽었을 때 어떠한

재산도 받지 못하고 경제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성의 재혼은 이혼 후 1백20일 만에 가능하나 남편이 집을 나갔을

경우 아내는 7년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이혼 할 수 있다. 이혼 후

아이들은 여아의 경우 5세까지 어머니에 의해 길러지다가 그후 아버

지에게 가야하고 남아의 경우 2세까지만 어머니가 기를 수 있다.

1980년부터 간통여성 잔인하게 처형

아버지가 사망했을 경우 아이들은 할아버지(부계)에게 넘겨지고 할

아버지 사망 시에는 아버지의 형제가 책임을 진다.

간통한 여성은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된다. 1m30cm 깊이로 땅을 파

고 그를 눕힌 다음 흙을 덮고 그 위에 남성들이 돌들을 가득 쌓는

다.

이런 식의 처형방법은 1980년에 시작되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의

여성들의 복장은 경찰 감시원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 여성들은 옷

으로 눈, 코, 입, 손을 제외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려야한다. 고동

색 류나 무채색이 아닌 화려한 색의 옷은 금지되어 있으며 만약 학

교, 거리, 사무실 등 공공장소에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강제노동이

부과되거나 혹은 현장에서 경찰 감시원들에 의해 매를 맞기도 하고

심한 모욕을당하기도 한다.

과거 호메이니 정권창출을 위해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저항운동을 벌

였던 수많은 여성들은 혁명의 성공 후 바로 정당을 만들었으나 몇개

월 후 그 정당들은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국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법원과 같은 중요한 국가기관에서 배제되었다. 이에

많은 여성들은 저항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금, 고문 받거

나 처형되었다. 호메이니 집권이래 ‘처녀’의 사형은 금지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강간하거나 몰래 처

형하곤 하였다.

이란 여성들의 현재는 과거 20여년 전 호메이니의 소위 ‘성스러운

혁명’의 산물이다. 당시 여성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으로 운동

전선에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독재에 대항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이란 여성들은 기만당하였다. 당시 독재 왕권의 서구화에 대

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여성들의 검은 차도르는 이제 새로운 여성 억

압의 상징이 되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스스로 되뇌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는 자는 쉽게 잊혀진다

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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