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참여와 안보혁신의 새로운 길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거수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거수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적 군대와 사회적 계약

이재명 대통령은 10월 1일 건군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군은 헌법과 국민을 지키는 민주적 군대여야 한다”며 “군인의 명예는 국민의 신뢰에서 나오고, 나라를 지키는 일은 곧 국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작권 환수와 자주국방, 첨단 무기체계 전환을 언급하면서도, 무엇보다 평화와 국민 보호를 강조했다. 이번 연설은 군을 단순한 무력 집단이 아니라 민주적 정체성을 가진 국민의 군대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군의 민주적 정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보는 무력 유지가 아니라 국민과 맺는 사회적 계약이기도 하다. 국민은 군복무, 세금, 재난 대응 같은 의무를 나누어 감당하고, 국가는 그 대가로 안전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남성에게만 복무를 지우는 방식은 오래된 계약 모델이다. 이제는 남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다층적 복무제도를 설계하고, 국가는 복무 경험을 능력 인증·경력 자산으로 환류시켜야 한다. 같은 임무에는 같은 기준을, 다른 임무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공정한 계약이다. 군이 ‘국민의 군대’로 신뢰를 얻으려면, 전투력이 아니라 이 계약을 지키는 능력이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UN 1325호와 국제적 기준

이와 관련해 여성 시민으로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 계약 구조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참여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가?’ 국제사회는 이미 2000년 UN 안보리 결의 1325호를 통해 여성의 참여가 평화와 안보에 필수적임을 합의했다.

1325호는 네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평화협상·안보정책에 여성 참여 보장(Participation). 둘째, 분쟁 상황에서 여성과 아동 보호(Protection). 셋째 갈등 예방 과정에 성평등 관점 반영(Prevention). 넷째 분쟁 이후 구호·재건에서 여성의 필요와 역량 반영(Relief & Recovery)이다. 

이 결의는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2015년 세계 최초로 성중립 징병제를 도입했고, 스웨덴은 2017년 징병제를 부활시키며 성중립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핀란드는 여성 자원입대를 확대했고, 독일은 해외 파병 시 여성 군인 배치와 성인지 훈련을 의무화했다. 이스라엘은 기존 여성 의무복무제를 국제 규범과 접목해 민간인 보호와 여성 군인의 현장 역할을 강조했다. 1325호는 유럽 각국이 “여성의 평등참여는 곧 안보 역량 강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다.

지난 2018년 스웨덴은 28명의 여성 군인을 말리(Mali) 평화유지임무(MINUSMA)에 파견했다.  ⓒUN Photo/Harandane Dicko
지난 2018년 스웨덴은 28명의 여성 군인을 말리(Mali) 평화유지임무(MINUSMA)에 파견했다. ⓒUN Photo/Harandane Dicko

여성의 정당한 참여 보장이 핵심

그러나 한국에서 여성의 안보 참여를 말하면, 흔히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서는 이미지만 떠올린다. 여성 징병 논의가 곧 “여성을 전쟁터로 내몬다”는 우려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1325호가 말하는 참여는 전쟁 수행자가 되라는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예방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파괴된 삶을 복구하는 전 과정에서 여성의 정당한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라는 요구다. 여성의 평등참여는 총을 들라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다.

대통령의 연설이 강조한 ‘국민 보호’와 ‘평화’라는 키워드는 이 점을 다시 일깨운다. 군의 기술혁신과 방위산업 투자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국민의 안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인공지능, 무인체계, 사이버 안보, 재난 대응 같은 새로운 안보 영역에 여성 인재가 참여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인구 절반의 역량을 방치하는 셈이다.

이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병역 개혁을 단순한 공정성 논쟁에 가두지 말고 국민 전체와 맺는 사회적 계약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둘째, 안보 정책의 전 과정에 여성과 시민사회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셋째, 군 장비와 무기체계의 혁신이 실제 국민 보호로 이어지도록 성인지 지표와 국제 기준을 반영해야 한다.

‘국민의 군대’라는 선언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한국은 민주적 군대로 거듭나는 동시에 여성과 다양한 시민 주체들의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형 안보 혁신의 출발점이며, 평화를 위한 군대의 새로운 길이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 여성의 정당한 참여를 보장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강선미 하랑젠더트레이닝센터 대표 ⓒ손상민 기자
강선미 하랑젠더트레이닝센터 대표 ⓒ손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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