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미의 이슈와 쟁점]

미군과 독일군이 함께 의료 훈련(혈액 수혈 훈련)을 하는 모습. ⓒ미 국방부/위키미디어 커먼즈
미군과 독일군이 함께 의료 훈련(혈액 수혈 훈련)을 하는 모습. ⓒ미 국방부/위키미디어 커먼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은 유럽의 안보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냉전 종식 후 대부분의 국가가 병력 감축과 모병제 전환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은 이 흐름을 거꾸로 되돌려 놓았다. 핀란드는 여전히 보편적 징병제를 유지하며 대규모 예비군을 보유하고, 노르웨이는 2015년 성중립 징병제를 도입했다. 스웨덴은 2010년 징병제를 폐지했다가 2017년 러시아 위협을 계기로 부활시켰다. 이처럼 유럽 곳곳에서 다시 징병제가 거론되는 이유는 단순한 병력 충원이 아니라, 러시아와의 장기 대치를 전제한 국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독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11년 징병제를 폐지하며 모병제로 전환했지만, 이제는 다시금 병력 확보의 압박을 받고 있다. 현재 현역 병력은 약 18만 명으로 스웨덴보다 훨씬 많지만, 인구 규모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견해다. 이에 정부는 매년 약 40만 명의 18세 남성 전원에게 복무 의향 설문과 신체검사를 의무화하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을 실제 복무시키는 방식으로 징병제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2026년에는 연간 2만 명, 2030년에는 3만8천 명의 신규 징병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NATO가 요구하는 26만 명 규모의 군대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독일 기본법(1949)은 오랫동안 남성에게만 국방의 의무를 부과했다. 여성은 간호·의무병 등 제한된 역할만 맡을 수 있었고, 전투병으로 복무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독일 여성 타냐 크라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투병 지원이 거부된 것은 차별”이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유럽사법재판소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계기로 2001년부터 독일군은 모든 직종을 여성에게 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여성은 전체 병력의 약 13%를 차지한다. 따라서 징병제가 부활한다면 여성도 동등하게 포함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현재 이를 둘러싼 독일 사회 내부의 논의는 다양하게 엇갈린다. 최근 슈피겔지 보도에 따르면, 메르츠 총리는 “자원 기반의 새 모델로는 부족할 경우 장기적으로 여성 징병도 배제하지 않는다”며 헌법 개정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이는 러시아의 위협 속에서 NATO 방위 목표를 충족하고 독일군의 전력 부족을 해소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을 반영한다. 군 참모총장 카르스텐 브로이어 역시 형평성 원칙을 들어 여성도 징집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현역 18만 명 수준의 군대만으로는 유럽 안보 위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군 수뇌부의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반면 좌파당(Die Linke)의 데지레 베커는 “여성에게 강제 복무를 부과해 자율적 삶의 1년을 빼앗는 것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다”라며 여성 징병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순히 여성 징병을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좌파당은 NATO 비판과 반군사주의 전통을 가진 정당으로, 애초에 징병제 자체를 부활시키는 데 반대해 왔다. 따라서 “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징병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침해하는 억압적 조치라는 것이 이들의 핵심 논리다. 정치학자 프랭크 사우어는 단순한 병력 충원이 아니라, 왜 징병제를 다시 도입하려는지 목적과 정당성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발언은 징병제가 단순히 병력의 부족 문제를 넘어, 국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제도라는 점을 환기한다.

향후 독일이 어떤 징병 모델을 선택하느냐는 단지 병력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시민에게 군복무 의무를 요구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청년 세대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국가의 안보 강화 필요를 투명하게 알리며, 정당한 보상과 사회적 지원을 보장해야 한다. 나아가 젠더·계급·가족 상황에 따른 불균등한 부담의 격차를 줄이고, 위기가 닥치기 전에 충분하고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평등한 책임’이라는 말이 권리와 의무의 균형 속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병력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원칙 위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독일의 시험대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절벽을 앞둔 한국 역시 중요한 것은 소요 병력을 어떤 원칙 위에서 정당하게 구성하느냐다. 결국 문제는 더 강한 군대가 아니라,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의지에 있다.

강선미 하랑젠더트레이닝센터 대표 ⓒ손상민 기자
강선미 하랑젠더트레이닝센터 대표 ⓒ손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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