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창호는 안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직원에게 두 차례에 걸쳐 “동성애자 아니죠?”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내부고발로 문제가 되자 그는 이 발언이 상대의 성적지향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직원들이 불편함을 느꼈다면 죄송하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해명이 인권과 관련해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성적 지향성의 확인이 아니라면 이 부정형의 질문은 오히려 동성애자 “아님”을 확정하고 싶은 욕망이거나 동성애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바람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느꼈다면 죄송하다는 해명도 적절하지 않다. 혐오나 차별 발언은 상대에게 정서적 타격감을 주지 않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창호 위원장의 그간 행적들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다. 그는 인권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끊임없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설적이게도 첨단 디지털 시대에 한국 정치인들은 주술을 포함하여 종교에 매우 심취해 있는 것 같다. 전 대통령과 영부인이 나랏일을 무속인과 상의했다거나 정당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특정 종교단체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온라인에 넘쳐난다. 그러나 공직자라면 적어도 정치와 종교, 법과 종교는 다른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기에 대부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미 청문회 장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들먹이면서 진화론은 증거가 없으며 창조론이야말로 과학적이기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안창호는 법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근대 헌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또한 그는 인권의 역사에서 소수자성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권은 언제나 더 많은 다양성을, 더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왔다.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자국민 중심주의로 점철된 근대 초기 사회에서 법은 여성, 흑인, 장애인, 이주민의 소수자적 위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권운동은 소수자들의 불리한 위치를 최대한 고려하는 방향으로 인권을 확장시키고자 했다. 이는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삶의 방식이 소수자들의 배제를 토대로 이루어졌음을 성찰하는 과정이자,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기도 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소수자들과 함께 살 생각이 없다. 소수자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다수에 대한 “역차별”이 생긴다는 그의 말은 부당하게 누려온 다수의 권리를 지속하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밖에 안창호는 인권을 침해하는 비상계엄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윤석열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그가 재빠르게 움직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사적으로 반동성애는 전체주의와 연결되곤 했다. 파시즘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나치가 반동성애 기치를 내걸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오늘날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유럽 우익 포퓰리즘이 불법 이민자에 대한 추방정책과 더불어 안티페미니즘의 기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반동성애의 주장이 급진화될 때 파시즘적 욕망과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계엄에 분노한다면 반동성애에도 분노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권과 관련된 이상의 이야기들은 특별한 것도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이 이를 부정한다면 그에게는 인권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이 확실하다. 인권의 무게가 무겁다면, 사퇴하라. 우리에겐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인권의 외연을 확장시켜줄 위원장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인권교육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인권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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