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뛰는 여자들]
산 달리는 트레일러닝 챔피언 김진희 씨
운동 않던 평범한 직장인에서
2023년 100km 16시간대 완주
세계 최대 UTMB 참가 앞둬
“달리기, 몰랐던 내 안의 강함 찾고
사회적으로 연결돼 행동하는 길”

본업은 환경 정책 연구원, 회사 밖에선 트레일러닝 챔피언. 산을 달릴 때 김진희(41) 씨는 다른 사람이 된다. 숲과 바위, 가파른 언덕을 가로지르며 포효하고, 환호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도 유유자적 자연을 즐긴다.
트레일러닝(Trail Running)은 산, 숲, 들판, 해안 등 자연 속의 비포장로(트레일)을 달리는 스포츠다. 달리기가 인기를 끌면서 좀 더 역동적인 트레일러닝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이 늘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선 쉽게 즐길 수 있다. 새 소리, 물 흐르고 바람 부는 소리, 계절이 선사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트레일 러닝의 묘미다.
트레일러너들 사이에서 ‘김진희’라는 이름이 알려진 건 2023년부터다. 그해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UTMB(Ultra-Trail du Mont-Blanc) CCC 100km 코스에서 한국 여성 신기록을 썼다. 100km 코스를 16시간 25분 20초에 완주했다. ‘2022 트랜스 제주 100km’ 1위, ‘2023 Amazean Jungle trail by UTMB 100km’ 부문 2위, ‘2024 옥스팜 트레일워커 100km’ 혼성팀 1위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미국 운동화 브랜드 호카(Hoka)가 후원하는 선수다.
“밤을 두려워하고 겁이 많은 제가 밤새 혼자 산길을 달리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달리기 전에는 몰랐던 제 안의 강인함을 달리기를 통해 찾아가고 있어요.”



지금은 100km를 뛰지만, 원래는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부산연구원 환경·안전연구실에 입사한 직후인 2010년 사내 마라톤동호회 회원들의 권유로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한 번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뛰어도 10km 완주에 1시간 16분이 걸렸다. 달리다 보니 체력이 늘었다. 원래 등산을 좋아했기에 산을 달리는 재미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병원을 드나들 때도 있지만 계속해서 러닝화를 신고 산으로 향했다.
더 마음에 드는 건 새로운 길들이 계속해서 열렸다는 점이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은 친구들과 함께 ‘세이브 더(Save the)’라는 달리기 모임을 만들었다. 지리산 산악열차 건설 반대 ‘세이브 더 지리’,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세이브 더 설악’, 제2공항 건설 반대 ‘세이브 더 제주’ 등 환경 관련 달리기 행사들도 진행했다.

달리기는 “단지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김씨는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달리기의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기부런’, ‘플로깅’처럼 건강한 신체 활동과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한 행사들이 많아지고, 시민들의 참여도 활발해졌어요. 달리기가 단순한 운동을 넘어 사회적 연결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요.”
여성 트레일러너로서 느끼는 고충도 있다. 100km 이상 장거리 대회에서는 보통 중간지점에 개인 물품을 넣어둘 수 있는 드랍백(Drop Bag)이 마련돼 있다. 여기서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먹고 옷가지도 갈아입으며 재정비한다. “남성들은 바로 옷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여성들은 달라요. 탈의실이 따로 없고 화장실이 휴식공간과 떨어져 있거나 청결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기록 경쟁에서 여성에게 조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느껴요.”
장거리 트레일러닝의 특성상 밤에 혼자 달려야 할 때, 길을 잃거나 야생동물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늘 걱정하죠. 그런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고 자신감도 붙더라고요. 충분히 즐길 만한 경험입니다.”

김씨는 달리기를 망설이는 여성들에게 작은 용기를 내 보라고 권한다. “팀 단위 행사를 추천해요.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걷고 달리다 보면, 긴 거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고, 무엇보다 트레일러닝의 진짜 매력을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거든요.”
“자신의 강함을 믿고 도전하라”고도 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마라톤에 출전해 굳건하게 완주한 첫 여성 마라토너가 있었고, ‘울트라마라톤은 여성에겐 무리’라는 편견을 깬 첫 여성 울트라트레일러너가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바클리 마라톤에서 36년 만에 완주 메달을 목에 건 최초의 여성 완주자가 2024년 나오기도 했어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가능성을 열어 준 선배 여성 러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어요. 나의 도전이 누군가에게는 빛이 되고 등대가 돼 줄지도 모르니까요.”
김씨가 여성들에게 추천하는 달리기 대회는 ‘옥스팜 트레일워커’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 코리아가 강원도 인제군과 함께 개최하는 대회다. 4명이 한 팀을 이뤄 100km 코스를 38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도전형 기부 행사다. 순위·기록 경쟁이 아닌, 순수하게 기부를 목적으로 달리는 행사다. 50km, 25km 코스도 있다. 올해 행사는 오는 24일~25일 인제군 일대에서 열린다.
“팀을 이뤄 100km를 함께 걸으며 기부금을 모으고, 그 기부금 전액이 긴급구호에 쓰인다는 점에서 달리기와 나눔, 사회적 연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아요. 저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어요.”
올 하반기 김씨의 달리기 무대는 유럽이다. 오는 8월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리는 UTMB 100마일 코스에 도전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트레일러닝 대회다. 2016년 처음 본 대회 영상에 매료돼 “언젠가 그 출발선에 서겠다”는 꿈을 곧 이룬다. 9월에는 스페인 칸프랑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선수권대회(WMTRC)에 한국 대표로 출전한다.
“두 대회를 성공적으로 완주하고 나면 저는 한층 더 강해질 것이고, 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좋은 곳을 향해 달리고 싶어요. 생명과 지구를 살리는 달리기, 사회에 도움이 있는 달리기라면 어디든 달려갈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