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혜원 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
85세 ‘현역’ 피아니스트·교육자
“음악, 엘리트 전유물 아닌 모두의 즐거움...
피아노 여정 80년, 이젠 내가 받은 은혜 되갚는 시간”

구순을 바라보면서도 왕성한 ‘현역’이다. 1939년생 ‘한국 피아노계 대모’ 장혜원(85) 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3·1 문화상, 한국음악상, 독일 십자공로훈장을 수상한 예술가이자 음악 교육자다.
피아노 인생 80년, 녹록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도 깊은 통찰력으로 새로운 목표와 성취를 이야기한다. 여유롭게 과거를 반추하다가도, 음악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 되는 이상을 이야기하는 눈빛이 반짝였고 음성은 경쾌했다. 모든 질문의 답은 ‘음악’으로 수렴되는 그의 삶과 꿈을 들었다.
5세에 시작한 피아노

피아노와의 인연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됐다. 경성제국대학 출신 의학박사이자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경 전 전 이화여대 의과대학 학장, 경기여고를 졸업한 어머니 김태임씨 모두 클래식 애호가였다.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어머니는 딸이 나오면 시키겠다고 일찌감치 피아노를 한옥 대청마루에 들여놓으셨죠. 5세에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전쟁으로 대구로 피난했을 때도 어머니는 방문 창호지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방바닥이나 밥상 위에 올려놓고 제가 연습할 수 있게 하셨어요.”
장 이사장은 “굶는 사람도 많던 시절 우리나라에 어떻게 그렇게 음악 애호가가 많았을까. 그 시절 그들과 함께 한 음악에 대한 갈구로 지금까지 왔다”고 회상한다. “지금처럼 돈만 내면 언제든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악보도 구하기 어려워 해외에서 한 부가 들어오면 음악가들이 서로 빌려 썼죠. 그 시절에 음악은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어요.”

이화여대에서 학·석사를 마친 그는 1964년 독일 정부의 국비 장학생(DAAD)의 한국 1호 음악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4년간 프랑크푸르트 국립음악대학에서 수학하며 한국인 최초로 최고연주자 학위(Konzertexamen Diplom)를 취득했다. 독일 라디오와 국영 TV 방송에 수차례 출연했고, 다양한 음악회와 실내악 연주에 참여했다.
귀국 후 1973년 동양방송(TBC) 주최로 당대 파바로티라 할 수 있는 프랑코 코넬리(테너),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되는 레나타 테발디(소프라노) 등의 내한공연 무대에도 반주자로 함께했다. 배재학당 강당과 부민관, 명동 국립극장 등 주요 공연장 무대에도 섰다.
1980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음반사 낙소스(Naxos)와 계약했다. 여기서 녹음한 음원이 영화 ‘툼레이더’, ‘캐치미이프유캔’ 등에 쓰여 화제가 됐다. 단독 음반 11장을 포함해 옴니버스 음반을 다수 발매했다. 바흐 7개 피아노 협주곡 전곡,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훔멜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등을 녹음했다.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은 아마존 ‘올해의 클래식 음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5년 이화여대에서 은퇴한 후에도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장으로 활동했으며, 2011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2023년 예술의전당에서 80주년 음악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세계 최대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에 따르면 지금도 매달 5만 7천명, 1년에 약 70만 명이 그의 음악을 듣고 있다.
이원문화원과 한국피아노학회 설립


1988년 그와 남편 이상복 전 서울의대 교수는 이 교수의 고향인 천안 성거읍 약 1만 평 부지에 이원문화원을 열었다. 자연과 음악이 공존하는 음악인을 위한 연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원’은 남편과 그의 이름에서 한 글씩 따서, 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산 풍경을 두고 지은 이름이다.
호숫가에 사과 창고가 딸린 시골집을 개조해 마련한 이 공간은 국내외 예술가들의 성지가 됐다. 라자르 베르만, 파울 바두라-스코다, 한스 레이그라프, 도미니크 메를레 교수 등 음악가들과 김남조, 조병화, 박경리 등이 강연을 했다.
“동네 여성들이 준비한 맛있는 한국식 집밥과 함께하는 축제”이기도 했다. 외국 참가자들에게 한국 다도 예절과 전통무용 등도 가르쳤다. “에어컨도 휴대전화도 없었고, 모기에 시달리고... 그래도 모두가 그 공간을 사랑했어요. 이제는 서울에서 행사를 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원문화원이 고향집 같대요.”


1991년 55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한국피아노학회는 이제 1000명이 넘는 학회가 됐다. 대부분 대학교수나 강사들로, 서울·경기, 영남, 호남·제주, 충청, 강원 등 다섯 개 지부로 구성됐다.
“우리 아시아인들도 유럽인들처럼 연합해야 한다는 비전으로 시작했어요. 국제적 기준을 가지고 교류와 행사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유일한 단체예요. 학술 단체론 드물게 전용 연구 센터도 있고요. 선임고문 5명, 집행이사 5명 총 10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갖춰 체계가 탄탄해요.”
학회의 빛나는 성과 중 하나는 2006년 시작된 아시아 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페스티벌(AIPAF)이다. 아시아와 유럽 전역의 교수들이 모여 마스터클래스와 강의를 진행하며, 매년 다른 음악 주제를 다룬다.
러시아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1930~2005)을 포함한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의 방한을 끌어낸 것도 장 이사장이다. “소피아 콩쿠르 심사를 맡았을 때 베르만을 만났어요. 우리 학회는 비영리 단체라 시간당 100달러밖에 제공할 수 없지만 꼭 와 주면 좋겠다고 했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듯 시큰둥하더군요. 그런데 며칠 후, 베르만이 나를 부르더니 베이징 방문 중 시간을 내어 한국에 오겠다는 거예요! 그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말이죠. 내한하는 겸에 이화여대 석좌교수로도 위촉됐어요. 역사적인 순간이었지요.”

그는 요즘 두 가지에 힘을 쏟는다. 기초 피아노 교재 ‘더 피아노 21C(The Piano 21C)’ 시리즈 보급과 ‘콘체르티노(Concertino, 소협주곡) 프로젝트’를 통한 ‘모두를 위한 피아노 교육’ 확대다.
그 자신도 음악 영재고 평생을 ‘음악 엘리트’들과 부대껴 살아왔지만, 장 이사장은 엘리트 중심 한국 피아노 교육은 한계가 명확하다고 본다.
“우리는 조성진이나 임윤찬 같은 스타만 키우면 되는 걸까요? 젊은이들이 주요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타오니 한국이 피아노 대국이 됐다고 하는데, 수만 명 중에서 한두 명의 뛰어난 솔리스트만 배출하면 끝인가요?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음악을 즐기고 노래하는 문화가 있어야 진짜 음악 강국이죠.”
그가 쉽고 친근한 작품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2022년 ‘콘체르티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국의 민요나 대중음악을 기반으로 작곡가들에게 친숙하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을 의뢰하고, 현악 4중주와 함께 연주하는 프로젝트다. 미국, 대만, 일본, 싱가포르 및 다양한 국가의 작곡가들이 참여해 지난해까지 총 100곡이 탄생했다. 연말엔 기념 연주회도 열었다. 전문 연주자뿐 아니라 어린이와 아마추어까지, 자연스레 피아노 연주와 다른 악기와의 앙상블 연주를 즐기도록 유도한다.
장 이사장은 피아노 교육은 ‘솔리스트 교육’이라는 관념을 깨야 한다고 본다. “사실 피아노는 훌륭한 앙상블 악기예요. 바이엘, 체르니 같은 익숙한 외국 교재가 아닌 우리 동요, 민요 등으로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중요하죠. 작은 규모의 협주곡을 연주하며 실력을 쌓으면 나중에는 더 큰 규모의 협주곡을 훨씬 쉽게 연주할 수 있고요.”

Piano 21C 교재 보급 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와 서울교대를 포함해 약 10개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됐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돼, 해외에서도 미 미네소타-위스콘신 대학교, 대만 피아노 학원가 등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몽골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용 교재도 올 상반기 완성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올해 미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그리고 중국까지 이 교재를 보급하는 게 목표예요. 학회의 저작권료 수입 증대 차원에서도 중요한 일이죠. 많은 음악가들이 보조금에만 의존해서만 활동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자립 모델을 제시하고 싶어요.”
예술가들이 외부 지원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음악가들을 돕고 싶다면 그들에게 계속해서 지원금을 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깨진 독에 물 붓기죠.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죠.”


고령에도 학회 이야기, 미래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깊어졌다. “아직 건강할 때 학회가 더 단단하게 뿌리 내리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후배들에게 전달하려고 해요. 아주 지적이고 헌신적인 젊은 음악인들이 많아서 기쁘고 든든해요.
나는 순수한 애국심으로 이 일을 해요. ‘금수저’로 태어나서 해외 유학에 박사 학위를 따고 좋은 기회들 속에서 성장한 음악인들에게도 늘 말해요. 여러분이 그간 받은 은혜를 되갚아야 한다고요.”
그가 못다 이룬 꿈 중 하나는 해외로 보내진 한국 입양인들을 위한 여름 음악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이원문화원이 그 아이들의 고향이 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한국을 찾는다면 머물 곳과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