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패턴 – 기억이 갑자기 사라졌고,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피해자들

경남경찰청 마약수사대가 압수한 GHB(일명 물뽕) 등 불법 마약류. ⓒ경남경찰청 제공
경남경찰청 마약수사대가 압수한 GHB(일명 물뽕) 등 불법 마약류. ⓒ경남경찰청 제공

필자는 피해자 국선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종종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말하는 성폭력 범죄 피해자들을 마주한다. 며칠 전 만난 피해자도 같은 말을 했다. 계속 술을 권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고, 상대방이 스킨십을 하여 에둘러 거부하자 칵테일을 건넸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상대방이 건넨 그 칵테일을 마신 이후부터는 무를 자르듯이 기억이 사라졌다고 한다. 보통 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기더라도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 그날은 칵테일을 마신 뒤로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고 갑자기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원치 않는 성관계가 이루어지던 중이었다고 했다.

피해자는 다음날 바로 산부인과 및 해바라기센터에 갔고 혈액을 채취했다. 칵테일에 약을 탔다고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피해자는 혈액 검사 결과를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국과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범죄가 의심되어 약물감정을 의뢰한 사건에서 약물이 검출되는 비율은 평균 25~26%, 하지만 ‘버닝썬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되어온 GHB, 이른바 ‘물뽕’은 단 한 번도 검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이번 사건에서도 약물이 검출될 가능성은 낮다. 만약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 칵테일에 아무 약물 넣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사고파는 사람은 많지만
발각된 사례 없는 GHB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에 대표적인 데이트 강간 약물인 GHB(물뽕) 불법 판매 광고는 2015년 대비 5배, 2018년 대비 30배 급증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클릭 몇 번, 메시지 몇 통 만으로 GHB를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온라인과 각종 메신저를 통해 너무 쉽게 GHB를 구입할 수 있게 된 만큼, 성범죄 처벌 사례도 증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국과수에 성폭력 범죄 관련하여 약물 검출이 의뢰된 사건 555건 중 약물이 검출된 비율은 26%이며, GHB는 검출되지 않았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국과수에 성폭력 범죄 관련하여 약물 검출이 의뢰된 사건 5058건 중 약물이 검출된 비율은 25%였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GHB는 검출된 사례가 없었다.

2021년부터 2023년에 선고된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범죄 사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단 1개의 사건에서 GHB 추정물질이 발견됐을 뿐이다.

버닝썬 사건을 계기로 짧은 반감기로 인해서 혈액검사나 소변검사를 하더라도 검출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GHB의 특성이 알려졌고, 전문가 감정제도 도입 등의 후속조치들이 이루어졌으나, 약물 검출이 되지 않은 대부분의 사건에서 불기소처분이 되고 있어 법률상 처벌의 공백이 가시화됐다.

피해자 상태를 판단 기준으로

약물이 검출된다고 해서 곧바로 가해자의 처벌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약물이 검출됐으나, 피해자가 다른 기회에 약물을 복용했을 것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 판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해자가 신체접촉에 동의할만한 사정이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피고인이 약물을 사용한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다.

이제는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판단의 기준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변경해야 한다. 2023년 일본은 부동의성교죄를 도입했다. 이미 법원의 해석에 의하여 강간죄의 폭행, 협박 요건이 완화되었다는 점, 죄형법정주의나 형벌법규의 명확성이라는 관점에서 죄가 되는 행위를 명확하게 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 재판 주체에 따른 법적용 상의 불균형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 피해자에게 저항할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보다는 피해자의 상황을 중심으로 판단하여야 하는 점 등을 고려하여 개정이 이뤄졌다. 우리 대법원도 최근 전원합의체판결로 강제추행 폭행·협박 요건과 관련해 최협의설을 폐기했으며, 준강제추행 사건에서 항거불능의 요건과 관련하여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안지희 변호사(안지희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안지희 변호사(안지희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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