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상]
신현진 광주과학기술원 반도체공학과 교수
윤희숙 한국재료연구원 바이오·헬스재료연구본부장
주성진 국방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반도체, 세라믹 3D프린팅, 방위산업 등 주목받는 과학 기술 분야에서 ‘최초’의 역사를 쓴 여성들이 ‘2024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으로 선정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았다. 여성에게 열린 문이 너무나 좁던 시절, 남성과 동등한 ‘연구자’로서 당당히 학계와 산업 현장을 넘나들며 활약한 이들이다. 이제는 든든한 선배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학술 부문 수상자 신현진 GIST 반도체공학과 교수
실리콘 대체할 ‘2차원 반도체 소재’ 실용화 기여
반도체 첨단기술 개발에 앞장서는 신현진 광주과학기술원(GIST) 반도체공학과 교수가 학술 부문 ‘2024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으로 선정됐다.
반도체 연구자라고 하면 으레 전자공학자를 떠올리지만, 신 교수는 본래 화학 전공자다. 화학과 유기화학으로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삼성그룹의 종합기술 연구소인 삼성종합기술원에서 20여 년간 근무하며 반도체 관련 기술의 실용화와 현장 적용 방안을 연구했다. 2023년 GIST에 합류해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불리는 2차원 소재 관련 연구에 힘쓰고 있다. 그 공로로 학술 부문 ‘2024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으로 선정됐다.
그의 연구는 반도체 산업 전반은 물론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다. 스마트폰, 노트북 등 작지만 복잡한 기능을 갖춘 전자기기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트랜지스터의 개발 덕이다. 트랜지스터란 반도체의 기본 소자다. 전자기기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기기 내부의 트랜지스터들이 전류의 흐름을 조절해 정보 전달·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더 작고 성능 좋은 전자기기를 만들려면 지금보다 혁신적인 트랜지스터 개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트랜지스터에 흔히 쓰이는 실리콘을 대체할 새로운 소재가 필요한데, 떠오르는 신소재 중 하나가 ‘MoS₂’다. 신 교수 연구팀은 이 MoS₂ 소재를 활용한 트랜지스터의 개발, 실용화를 위한 대면적 성장과 계면제어 기술로 신소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상은 제가 그동안 연구하며 마주했던 고민과 도전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응원으로 느껴져 무척 기쁘고 뿌듯합니다.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신 교수는 “반도체는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지만, 이 기술이 우리의 일상 속 혁신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대중이 이해하고 공감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반도체 분야의 가장 큰 매력은 물리, 화학, 소재, 전기, 전자 등 다양한 학문의 융합에 있다. 그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전문가들과 협력하며 견해를 확장하는 과정은 매우 큰 즐거움이자 연구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학계로 자리를 옮겨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연구에도 도전해 보고자 한다”며 “새 연구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글로벌 연구진과의 협력을 강화해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학생들에게는 지식 전달 및 연구 성과 창출을 넘어 연구 윤리와 과정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사고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많은 선배들의 노력 덕에 이제는 연구 성과가 성별로 평가받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느낀다”면서도 “여성 과학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서 그들의 성과가 충분히 가시화되지 못하고, 여성 과학자들이 가정과 연구 간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하는 상황은 여전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경력 단절 없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정책적, 환경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반도체 분야에 진출하고자 하는 여성 연구자들에게는 “조급해하거나 쉽게 지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연구는 마라톤과도 같아서 꾸준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잠시 걷더라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결혼, 출산, 육아 등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연구와 가정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겠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다시 도약할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연구를 단순히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여기기보다는 스스로 즐기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흔히 반도체 공학 연구는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합니다. 물리, 화학, 소재, 화공, 전기, 전자 등 다양한 학문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매우 융합적이고 창의적입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성과에 연연하기보다 주변 동료와의 협력을 통해 더 멋진 결과를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도전이 곧 반도체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자신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세요.”

산업 부문 수상자 윤희숙 한국재료연구원 바이오·헬스재료연구본부장
세라믹 소재 한계 극복 3D 프린팅 기술 최초 개발
치과 진료에서 흔히 쓰이는 인공 치아부터 허리디스크 수술에 사용되는 골이식재까지, 모두 3D 프린터로 간편하게 만드는 시대가 온다.
올해 산업 부문 ‘2024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으로 선정된 윤희숙 한국재료연구원 바이오·헬스재료연구본부장은 이 ‘꿈의 기술’ 개발을 주도해 온 전문가다. 그간 국내외에서 등록한 기술개발 특허만 50여 건이다. 국내 기업에 일곱 차례 기술을 이전해 상용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산업용 3D프린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프린터로 물건을 찍을 때 쓰이는 ‘소재’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윤 본부장은 흔히 쓰이는 플라스틱 외에도 다양한 3D 프린팅 전용 소재를 개발하고자 노력해 왔다.
특히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서 쓰이지만, 깨지기 쉬워서 정밀 제조가 어려운 세라믹 소재의 한계를 넘을 방법을 연구했다. 국내 세라믹 산업은 꾸준히 대외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소재와 장비 기술도 대부분 해외시장에 의존하는 현실이다. 윤 본부장은 “기술적 혁신 없이 침체한 시장을 활성화할 방법이 없다”고 봤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최근 세계 최초로 광중합 기반 다종 세라믹 3D프린팅 소재·부품·장비 기술과 무소결 세라믹 3D프린팅 기술을 개발했다. 두 종류 이상의 소재와 빛을 활용해, 튼튼하고 정교한 세라믹 골이식재와 의료부품을 3D 프린터로 찍어내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다. 세라믹을 고온 열처리해도 모양이 변형될 걱정 없이 정교한 3차원 구조물을 만드는 기술도 개발했다. 반도체·에너지 등 분야 부품 제작에도 적용할 수 있어, 경제적·산업적 파급효과가 큰 기술들이다.
그는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상’을 받게 돼 매우 영광스럽고 기쁜 동시에 큰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낀다”며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윤 본부장은 2006년 ‘여성 연구자의 불모지’였던 한국재료연구원 사상 첫 정규직 여성 박사(선임연구원)가 됐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여성 1호’ 호칭이 불편하다고도 했다.
“우리가 아직도 ‘여성 과학자’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사회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여성 과학자를 동료로 두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물론 여성 과학자가 늘면서 성과를 인정받고 리더십을 보이는 여성들도 늘고 있습니다. ‘여성’이 아닌 동료‘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함께 일하는 환경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봅니다. 꾸준히 실력과 능력으로 본인의 위치에서 가치를 입증하면 유리천장을 깰 기회가 온다고 믿습니다. ’여성 과학자‘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날이 곧 오리라 믿습니다.”
그는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길을 찾아내기를 즐긴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낼 때, 그것이 세상에 필요한 기술임을 입증하고 검증받을 때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힘들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이 일을 계속하게 되는 매력이기도 합니다.”
여성 과학자들과 지역 내 청소년 등의 멘토링에도 힘써 왔다. “‘공대를 가서 공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연애도 못 하고 공부와 연구만 해야 한대서 고민’이라는 여학생들이 있어요. 막연한 두려움을 깨려면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 과학자들을 많이 접하고, 연구도 개인의 삶도 열심히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저도 제가 어떻게 성과를 냈고 어떻게 제 삶을 즐기고 있는지 함께 표현합니다. 제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거나 박사님처럼 되고 싶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가끔 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진흥 부문 수상자 주성진 국방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금녀의 영역’ 방산 분야 여성 인재 확대·양성 기반 닦아
오래도록 ‘금녀의 영역’이던 방위산업 분야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최초’의 역사를 쓰는 한편, 더 많은 여성이 장벽을 넘어 업계에서 꿈과 능력을 펼칠 기반을 닦았다. ‘2024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 진흥 부문 수상자, 주성진 국방과학연구소(ADD) 수석연구원 이야기다.
1989년 ADD에 합류한 그는 ADD 설립 이래 첫 여성 수석연구원이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당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던 ADD가 여성에게도 채용의 문을 연다는 소식에 지원, 합격했다. 소총, 자주포 등 무기 개발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그 시절 사격장에 가면 “왜 여자가 여기에 오느냐”는 남성 동료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20여 년 전만 해도 ADD의 여성 연구원들은 임신 소식을 자연스레 알리고 배려를 받기는커녕 연구소 화장실에 숨어 간식을 먹곤 했다.
경영 업무를 맡게 된 주 수석연구원은 변화의 물꼬를 틔웠다. ADD 여성위원회를 최초로 신설해 여성 인력 양성, 제도/환경 구축 및 여성 승급/보직자 확대를 추진했다. 임신한 여성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모성보호실도 만들었다. 다른 공공·민간 연구원도 뒤따라 여성위원회와 모성보호실 신설에 나서면서 업계 전반의 성평등 인식 확대에도 한몫했다.
“여성만을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기관 차원에서 여성 인력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고, 여성도 주위 동료 여성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래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 발전시켜가는 길이지요.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 만들어가기를 권합니다.”
그는 이외에도 여성과학기술인 단체와 정부 부처를 오가며 여성과기인의 전문능력 향상을 돕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방부장관 표창, 과학기술진흥 유공자 정부포상, 여성공학기술인대상(산업부 장관 표창) 등도 받았다. 은퇴를 바라보는 지금도 대전시 과학기술자문, 교육부 자격정책심의위원 등을 맡아 활약하고 있다.
“여성과학기술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온 세월이 30년이 넘었습니다. 선배님들 하시는 일에 박수 치고 자리 지키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해, 이제는 후배들에게 격려 보내는 위치가 됐어요.”
그는 “여성성과의 저평가, 유리천장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면서도 “어딜 가나 제가 여자 화장실을 독차지하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어떤 회의에 가도 나 말고도 여성이 또 있다는 것이 별로 신기하지 않다. 후배 여성들이 탄탄히 올라오고 있어서 희망적”이라고 했다. “여성이 고위직이나 임원급에 더 많이 포진해 여성과학기술인들의 근무 환경과 제도가 향상되도록 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고도 했다.
앞으로도 자신과 같은 고경력 여성과학기술인들의 활동에 힘을 보탤 계획이다. “많은 여성들이 제도적으로는 은퇴를 하지만 아직 활동해야 할 일들이 많고 기여할 부분도 많습니다. 본인의 전문분야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국가 산업 분야에서 활동하게 하고, 국내외 후진 양성, 과학문화 확산 등 다양한 사회 기여 활동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다져 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