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동향
2부 한국젠더법제사

전두환 육군 보안사령관은 1979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최근 천만 이상 관객을 모은 ‘서울의 봄’ 영화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1980년에는 5월 17일 내란을 주도하고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돼 1988년 2월 24일까지 집권했다. 헌정사에 있어 제5공화국 시대와 ‘제6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때를 포함한다.
이 시대에 법은 성별에 대해 어떠한 인식에서 어떻게 규율했을까? 한국젠더법제사에서 이 시대는 이전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전환기이다. 광복 후부터 주로 요보호여성을 지원하던 “부녀정책”이 1980년대부터 모든 여성의 인적자원화와 사회참여로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여성정책”으로 전환됐고 이에 필요한 입법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이 입법안을 마련하고 입법을 요구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에서도 시대적 특성을 가진다.
전환기의 촉진제가 된 요인들
이러한 전환기를 이룬 배경에는 UN의 ‘여성차별철폐협약’의 비준 촉구와 국내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유화책 등이 있다. 특히 1983년에 발생한 세 가지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젠더법 전환기가 이뤄진 촉진제가 됐다. 첫 번째 사건은 전화교환원인 여성근로자가 거의 여성들로 구성된 교환원 직종의 정년을 다른 직종보다 12세 낮게 43세로 정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인사규정이 성차별을 금지한 ‘헌법’과 ‘근로기준법’에 위반된다며 1월에 최초의 여성고용차별 투쟁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여성문제 전담 정부 출연기구인 ‘한국여성개발원’이 4월에 개원하고 민·관협력체제의 여성정책 심의·조정기구인 ‘여성정책심의위원회’가 12월에 설치돼 여성정책의 전문화 시스템이 마련된 사건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은 1982년 12월 31일 제정된 ‘한국여성개발원법’에 의해 여성문제에 관한 연구와 교육, 정보제공, 여성활동 지원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각종 조사연구를 통해 여성정책의 과제와 입법안을 제언하는 작업을 했다. 필자는 공채 1기 연구원으로서 9월에 입사해 법제연구 담당자로 약 18년 6개월 근무했다. ‘여성정책심의위원회’는 1983년 12월 8일 제정된 ‘여성정책심의위원회규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관련 부처의 장관들과 여성단체 대표, 전문가 등으로 위원을 구성했다.
세 번째 사건은 최초의 진보적 여성운동단체인 ‘여성평우회’가 6월에 창립되고 여성주의에 기초한 여성운동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여성평우회’는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가부장제 사회를 여성주의에 기초해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주로 여성노동자, 여성빈민 등의 기층여성 중심의 운동을 표방했다. 그 실천으로 최초의 여성차별정년무효소송에 대한 후원회를 결성하고 여성결혼퇴직제 등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운동을 여러 여성단체들과 함께 연대하여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87년에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등으로 분화돼 진보적 여성운동을 더욱 확산시켰다.
여성 권익과 성평등을 위한 입법과 한계
이러한 배경으로 전두환 통치시대에 여성권익과 성평등을 위한 다양한 입법이 이뤄졌다. 그러나 한편, 성평등 인식이 적었던 시대적 한계와 관료들의 시행착오 등으로 입법상의 오류도 발생했다. 현재의 성평등 관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여 향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젠더법 동향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5공화국 헌법’에 '양성의 평등'을 명시
신군부는 ‘제5공화국 헌법’을 추진하면서 군사반란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한 유화책으로 각계에 의견서 제출을 요청했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최초의 여성헌법학자인 윤후정 교수 등 전문가들이 작성한 의견서를 여성계 의견으로 제출했다. 그 영향으로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헌법’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돼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 입법은 ‘제헌헌법’에 규정됐다가 박정희 통치 시대에 1963년 개정 ‘헌법’에서 삭제된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라는 조문을 사실상 부활시킨 것이다. 남계혈통의 가(家)를 계승하는 호주제를 중시하며 여성차별을 당연시하던 종래의 가부장적 가족질서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국가의 기본질서로 천명한 점에서 입법의의가 크다.
여성고용촉진과 성별분업관 해소 입법
1980년대 초에 여성고용을 촉진시키기 위한 입법들이 이뤄졌다. ‘직업훈련기본법’은 1981년 12월 31일 개정될 때 “여성에 대한 직업훈련은 중시돼야 한다.”는 것을 직업훈련의 기본원칙에 포함시켰다. 1982년 4월 3일 개정된 ‘직업안정법’은 “노동부장관은 여성에 적합한 직종의 개발 및 취업기회의 학대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1982년 8월 13일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개정해 여성사용금지직종을 30개에서 6개로 축소한 것도 이에 해당하는 입법이다.
또한 1984년 4월 7일 전부 개정된 ‘선원법’은 “녀자를 선원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한 조항을 삭제했다. 그리고 ‘제9장 소년선원과 여자선원’을 신설하여 여자선원에 대해 위험·유해한 작업, 야간작업, 출산 전후 각각 6월 이내의 사용을 금지하고 월경휴식과 산전후휴식을 주도록 규정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