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경주 APEC 공동 선언에서 4년 연속 명시되었던 성평등 관련 공약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AI 이니셔티브를 승인”하며 AI의 잠재력이 강조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성 관련 용어가 다른 회원국의 ‘레드라인’(한계선)이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이재명 정부가 ‘실용적 시장주의’를 내세우며 AI를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는 동안, 성평등 의제는 국제적 외풍에 밀려 포기할 수 있는 부수적 가치로 취급된 모양새다. 그러나 성평등 의제가 빠진 AI는 불평등을 확산시킬 위험한 도구에 불과하다.
AI가 우리의 미래를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와 비교하면 AI가 학습하는 그 ‘현실’이 불평등하고 따라서 인공지능이 내놓는 결과물 역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기술은 객관적’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주관적’인 인간의 개입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AI를 활용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여기에는 불평등한 데이터를 감지하고 개선하는 인간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기술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아서다.
인공지능의 편향성은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올해 초 참가했던 한 여성 작가의 북토크에서, 주최자가 포스터 제작을 위해 이미지 생성 AI에 ‘여성과 남성이 책을 사이에 두고 대화 나누는 장면’을 그려 달라 요청했더니, AI가 남성이 책을 들고 여성을 가르치는 구도를 그려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이 작가이고 남성이 사회자’라며 구체적인 역할을 재차 명시해도 성별 권력 구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결국 주최자는 동등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여성 두 명이 대화 나누는 장면’이라는 명령어를 넣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인종 위계가 나타났다. AI가 성별과 인종에 따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나누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불평등한 현실을 학습한 AI는 여성의 일자리와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 아마존이 AI 채용 시스템을 도입했다가, ‘여성’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력서를 낮게 평가하고 여자대학 졸업생을 불리하게 판단하는 결과를 보고 해당 시스템을 폐기한 것이 이미 7년 전 일이다. 의료 분야는 더욱 심각하다. 심장병 예측 AI가 주로 남성 데이터를 학습한 나머지 여성 환자에 대한 오진과 치료 지연을 초래하고, 흉부 엑스레이 AI는 여성 환자, 특히 흑인 여성에게서 질병을 과소 진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의학 기술이 발달한 듯 보이지만, 여성과 유색 인종은 바로 그 발전된 기술로 인해 위험에 빠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이미 데이터 편향이 일으키는 문제를 거론하며 AI와 성평등을 적극적으로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를 고려하면 ‘경주 선언’에서 회원국의 레드라인을 의식해 핵심 현안에서 ‘여성’ 대신 ‘모든 사람’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사용했다는 정부 입장은 다소 옹색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라면 힘껏 밀어붙이는 대통령의 성향을 떠올리면 더욱 아쉽다. 이러한 가운데 몇몇 페미니스트 논자들이 ‘경주 선언’을 비판하고 나섰다.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이 한국은 ‘성평등 지수 꼴찌 국가’라고 지적하며 “AI의 젠더 편향 문제가 심각한데, 성차별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미래는 더 기울어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한 것이 그중 하나다.
비판에 직면한 성평등가족부는 6일 ‘AI 성평등전략 포럼’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성평등 관점에 입각해 ‘AI 알고리즘 편향 개선’을 중심으로 인공지능 기술 확산에 대응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럼에도 우려는 여전하다. 성평등가족부가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에서 배제되어 있어서다. 따라서 앞으로는 성평등가족부의 내부 논의가 AI 관련 핵심 논의 테이블로 순조롭게 연결될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AI 기술을 통해 침체된 경제 지표를 개선하고, 이를 미래 먹거리로 성장시키겠다는 야심을 분명하게 표명해왔다. 앞으로도 AI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쉼 없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대통령은 성평등한 사회에 대한 의지도 여러 차례 보였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AI라는 새로운 권력이 젠더 편향을 영구화하지 않도록 과학기술과 페미니즘의 협력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기술 발전의 혜택을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분배하고, AI 시대의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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