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손희정 지음

‘페미니즘 리부트’가 10년을 맞았다. 그간 그 말을 수없이 많은 기사와 칼럼에 써넣었다. 여자들이 온라인에서 집단 행동에 나서고,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관련 출판물과 연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2010년대 중반부터의 흐름을. 그 때마다 우리말로 ‘재부흥’, ‘재시동’이라고도 번역하던 ‘리부트’(reboot)의 뜻을 새삼 되새기기도, 또는 그런 지각조차 없이 습관적으로 썼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10년 째를 맞은 올해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로부터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라는 말을 들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영속적인 운동이었건, 간헐적인 화력이었건 간에 이쯤 되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은 톺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그래서 집어든 책이다. 저자인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2015년 <문화/과학> 가을호에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처음 썼다. ‘리부트’는 영화에서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기본 설정만 유지하며 작품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예시로 든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에서부터 메르스 갤러리의 미러링 스피치, 온라인 기반의 여성 운동은 페미니즘이라는 기본 설정은 유지한다. 그러나 ‘리부트’라는 말이 영화라는 산업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수사’이듯이, 페미니즘 리부트는 알파걸·커리어우먼 서사가 지배적이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장에서 탄생한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실패로부터 등장한 것이었으며, 정확하게는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판타지의 실패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86쪽)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겪은 지금,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여성신문이 지난 4월 내놓은 ‘2030 여성 유권자 리포트’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30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60%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 중 절반 가까이가 “젠더 평등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건 부담스러운” 스텔스페미니스트(레이더에 의한 탐지를 어렵게 하는 군사용 은폐 기술인 ‘스텔스’처럼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지 않는 것)였다. 그 사이 우리는 두 번의 대통령 탄핵 광장에서 ‘페미존’과 ‘응원봉 부대’의 주역이었다. 2015년 메갈리안,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2017년 미투 운동, 2018년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2019년 N번방 사태, 2024년 딥페이크 성착취 사태 등 많은 파고를 넘었다. 여성신문의 기사에는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 당시 20대 여성 2명 중 1명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한 것과 차이가 있다고 적혀 있다. 남들 앞에서의 공표를 뜻하는 ‘밝힌다’와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2025년의 설문 결과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 느껴진다. ‘페미’가 지속적으로 ‘논란’으로 소비된 현실, ‘집게손’ 등을 위시해 여성 노동자들을 향한 공격과 괴롭힘, ‘페미’라는 이름의 물리적인 폭력까지 등장한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결과다.
백래시로 인한 위협, 그 많은 여성들이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왔음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피로감 때문일까. 올해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은 많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가 존재할 만치 여성들의 삶을 바꾼 역사적 전환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어떤 전망을 그려나갈지 고민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자주 ‘초콜렛처럼 꺼내 먹는’ 한 장면이 있다. 2021년 10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직에서 퇴임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이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20대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 그에게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탄생 가능성을 물었다. ‘2050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2050년까지 100만명을 화성으로 이주시키겠다고 하잖아요. ‘지구는 버리고 갈게. 너네는 쓰레기통에서 잘 살아’ 이거죠(웃음). 훼손된 땅을 다시 살려 낼 수 있는 건 돌봄과 여성주의 말고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서울신문, <“이 땅 살리는 건 돌봄·여성주의… 조급하지만 않으면, 연대는 가능”>, 2021.10.12.) 나는 갸웃하면서 재차 물었다. “그건 디스토피아인가요? 유토피아인가요?” 그는 말했다. “디스유토피아죠.”
그 때는 절망적이었던 그 말이, 요즘은 위안이 된다. 훼손된 땅을 다시 살리듯, ‘나’를 살리는 일이 돌봄과 페미니즘이고, ‘100만명의 인구가 화성으로 향하는 그 날’까지 오랜 세월 다투고 화해하며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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