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읽기]
영화 ‘어쩔수가없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화려한 역작 ‘어쩔수가없다’는 AI 자동화 시대의 제지 공장에서 해고된 후 재취업을 향해 분투하는 중년의 남성 가장 만수를 주인공 삼는다. 그가 눈여겨본 업계 1위 공장의 관리직은 단 한 자리. 이미 쟁쟁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어 구직의 가망이 보이지 않고, 손에 쥔 그 무엇도 놓을 수 없어 초조해지자 만수는 ‘어쩔 수가 없이’ 그들을 제거하는 극단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렇게 그는 해고 전 “당신들 다 잘리면 나는 혼자 남아서 누구랑 일합니까?”에서 우러나온 애틋한 연대를 잊고, 해고의 주체인 기업이 선심 쓰듯 제공한 심리치료에 굴종한다. 부인이 전하려고 애쓰던 진심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한 귀로 흘린 채, 싸움에서 이긴 자만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논리에 수긍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설 속 부인들의 흐릿한 존재감을 복권시킨 섬세한 캐릭터 구축에 있을 것이다. 배우 손예진과 염혜란의 명연기는 소설 속 ‘바깥양반’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모른 채 순수를 유지하는 ‘가정의 천사’도, 이름도 서사도 없는 단역 중 하나도 아닌, 욕망에 충실하게 생동하는 인물을 다시 빚는다. 만수의 강력한 경쟁자 범모의 침묵 앞에서 첫 만남의 짜릿한 추억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사랑의 불씨를 살려보려는 범모 부인 아라의 결단력은 소심하고 기만적인 가장들을 양 옆에서 죄여온다.
영화는 풍부한 상징을 통해 ‘어쩔 수가 없다’고 밀어붙이는 자본주의에 맞선 자연의 ‘섭리’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인류가 존속시키지 못했을 발명품의 해체를 시도하려 한다. 그 발명은 바로 가부장 제도와 정상가족 신화다. 제가 만들고 따르는 이상적인 가족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남성 가장 만수의 얄팍함은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의 이주-돌봄노동자, 매 맞는 아내였던 서래가 품위 있는 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과정과 기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댄스파티에서 병원 동료들이 미리를 따라 원주민 복장을 준비했다는 언급을 고려한다면 영화 속 세계에서 ‘우리’는 만수와 미리가 아니다. 미국인 존 스미스의 제복을 입은 만수는 선량한 선주민의 평화를 해치러 온 전형적인 남성 이방인 침략자다. 또 남들의 메아리로만 말한다는 첼로 천재 딸 리원은 그리스신화 속 요정 에코의 노골적 은유다. 어떤 전승에서 에코는 함께 자란 님프 자매들과 달리 혼자만 인간 아버지를 둔 필멸의 존재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의 노래가 다른 이들보다 더 아름다웠고, 그래서 그만이 멍청하게 인간 남자 나르시시스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모녀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한 전설은 결국 결말에서 그 ‘인간 아버지’가 자리를 비워야만 ‘원본’의 첼로 연주를 들려주는 에코의 모습으로써 완성된다.

만수는 제 경쟁자들에게서 참 뻔하게도 ‘외로운 아버지’의 상을 읽어내고 만다. 부인 아라의 외도를 목격하고 바닥에 구르는 범모의 붕괴 앞에서 만수는 자기 미래를 보고 연민을 느낀다. 어렵사리 그들을 죽일 때 만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 ‘남자답지 못한’ 속성, 즉 우유부단함, 실속 없음, 허세와 열패감까지 하나씩 제거하며 점점 더 과감해진다. 미리는 너무 늦기 전에 경고하려 했다. “당신이 뭔가 안 좋은 짓을 한다면, 그건 나도 같이 하는 거야.” 그러나 만수는 부인과 자식들을 자기 삶의 부속 정도로 여기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악행의 굴레에 빠진다.
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맨박스에 가둔 이의 헛된 자신감은 만수뿐 아니라 미리마저 부수고 만다. 시원에게 “너랑 내가 우리집 여자들을 지키는 거야”라고 폼 잡으며 선언하지만 실상 만수의 가장 어두운 비밀마저도 지켜주는 가족의 보호자 역할은 미리가 모조리 해내는 역설을 보라. 댄스 파티 후 외도를 의심하는 만수에게 미리는 우아하고 순수한 사모님의 외피를 깨고 내지른다. “너는 내가 얼마만큼 천치로 보이니?”
긴급한 순간에는 시원을 꼭 ‘우리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미리. ‘애 딸린 이혼녀’에게 총각이 구애했단 사실을 몇 번이고 언급하는 미리. 그의 처세는 과거 알코올 중독이었던 만수를 제정신에 묶어두기 위한 자학적 전략처럼 다가온다. 두번째 이혼은 그가 누리는 모든 것, 좋은 집과 적당한 지위, 딸애의 천재성, 부부 간 상호 헌신으로 쌓아온 동지애, 무엇보다도 그가 목숨보다 아끼는 아이들의 평온을 다 찢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리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숫자를 내려가며 세어야 할 정도로 징그러운 형벌 같아진 포옹도 간신히 버텨낸다. 품에 안긴 남자의 멍청한 분투가 정말이지 괜한 것이었단 진실을 미리만이 알기에 그가 안쓰럽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말해주지만 만수에겐 마지막 애정의 표현마저 제대로 닿지 못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만수는 할아버지가 돼지를 묻고 아버지가 사람을 묻은 것처럼 아들에게 훔친 장물을 묻고 지나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만다. 가부장의 원죄란 ‘어쩔 수가 없이’ 덮어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썩어가는 것을 파내봤자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
결말에서 새 회사로 출근하는 만수를 바라보는 미리의 망연한 눈빛은 절대로 전과 같아질 수 없다. “이제부턴 돈 모을 거야.”라는 선언은 언젠가 남편을 두고 아이들과 떠나기 위함이었을까. 뿌리부터 벌레 먹어 손쓸 수 없어진 나무처럼, 혼자만의 비장함에 취해있는 아버지란 병폐가 행복했던 가족을 가장 안쪽부터 천천히 확실히 망가뜨린다. 어쩌면 시원도 ‘엄마를 쉬게 해주기 위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좀 더 톡톡히 치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겨우 그런 남자로 크지 않기 위해서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