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지난 주말에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 다녀왔다. ‘페미니스트 정치’에 관한 갑론을박이 쏟아져 나왔다. 내란 진압에 앞장선 것이 102030 여성들인 만큼 내년 6·3 지방선거에서 확실히 여성 몫을 달라고 정당에 청구서를 내밀어야한다는 의견, 여성 정치인들 가운데 지역 의회에서부터 차례차례 기반을 다진 이들이 적다는 한탄, 지역 의회에서 중앙으로 진출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는 자평까지 여러 가지 의견들이 쏟아졌다.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청년 여성들이 활약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러나 파면 이후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자 여성 지우기는 또 한 번 시작됐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의 성평등 공약이 2022년 대선 때보다도 후퇴했다. 후보 5명이 모두 남성이었으며, 대선 TV 토론에서는 실시간 성폭력이 자행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후 현재까지 단행된 대통령실 수석급 이상 인사 9명 중 단 1명만 여성(오현주 국가안보실 3차장)이다. 남성들이 즐비했던 이 대통령의 후보 당시 선거대책위원회를 떠올리자, 내각 여성 비율을 “30%를 넘기는 걸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다”던 후보 시절 공약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 부호가 생긴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에다 겐타로의 책 『여성 없는 민주주의』는 ‘정치 권력이 남성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일본을 왜 민주주의 국가라 할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한 책이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20%에 그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인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책은 젠더 규범에 따라 성별 역할이 나뉘는 현실 속에서, 여성 정치인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이중 구속’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여성 정치인이 듣는 ‘독신’이라는 야유는 가정을 꾸려 육아·살림을 하는 여성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비난이며, 반대로 주부 정치인에게는 “부엌의 감각으로 정치를 하려고 한다”는 조소가 쏟아진다. 이를 한국의 청년 여성 정치인에 적용하면 이중 구속 상태에 더해 한 가지가 더 있다. ‘모두의 수고를 독점하려 한다’는 식의 여성 사회 내부의 비판이다.
『여성 없는 민주주의』는 여성 정치인이 나오기 힘든 내재적 요인에 더해 정당의 조직과 선거제도의 영향 같은 대외적 요인도 짚는다. 사회적 의제와 리더십을 조직하는 정당은 여성의 정계 진출을 막는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승자독식에 기반한 다수결형 민주주의보다는 정당 간 협력을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는 다당제 형태의 합의형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의회의 여성 비율이 높았다. 책은 여성의 의회 진출을 늘리는 궁극의 해결책으로 젠더 쿼터(여성 할당제)를 제시한다. 젠더 쿼터를 도입한 사례로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언급됐다. 그러나 비례대표의 여성 후보자 비율을 50%로 정한 한편, 비례대표 의석수 자체가 전체의 15.3% 밖에 안 된다. OECD 가입국의 평균인 40%에 비해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여자들은 언제나 광장에 있었지만, 늘 새롭게 팝업된 것처럼 이야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장과 다음 광장 사이에 자리한 대의 정치의 장에서, 여성들이 지워지고 사라졌던 오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광장에 나온 여자들은 한동안 “기특하다”며 상찬의 대상이 되다가, 선거 국면에 들어서면 공약에서 사라지고 유권자를 넘어서는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정권을 타도하러, 제도권 정치에 반영되지 못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러 그들은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만난 청년 여성들은 자신들이 광장의 주축이 된 이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사람들”, “가장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권의 반여성 정치에 대한 반감이 비상계엄으로 폭발했다고 했다. 대선에서 김문수·이준석을 향한 표심을 두고 ‘2030 남성의 극우화’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동세대 여성들은 여기에 동의했다. 또래 남성으로부터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처럼 ‘계집신조’에 비견될 만한 말을 현실에서 듣고, 딥페이크 피해를 입고, 교제폭력 같은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혐오 범죄에 노출된 현실 때문이다. ‘보수’나 ‘극우’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청년 여성들은 반페미니즘에서 남성들의 극우화 경향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이를 ‘극우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하에서 가장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윤석열을 몰아냈다. 그리고 줄기차게 외쳤던 자신들의 이야기가 정치의 장에서 정책이 될 것을 주시하고 있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에서 여자들의 유리천장이 깨지는 것은 광장에 선 여자들의 결과이자 앞으로의 토대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명 정부의 첫 내각에 여성들이 얼마나 입성하는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의 정책 비전과 개혁 의지를 엿보는 가늠자이자, 여성 없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뜯어고치는 일의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