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31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본관 앞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본관 앞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뉴스로 접했을 때 불현듯 방콕으로 떠난 친구가 생각나 메신저로 안위를 물었다. “혹시 한국에 들어왔어?” 다행히 그는 한국에 있었고 뉴스로 참사 사실을 접했다고 한다.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며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참사는 반복됐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현장 생중계를 보며,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있었던 2003년을 떠올렸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연기가 자욱한 TV속 화면으로 보며, 어머니에게 친척들은 괜찮냐고 물었다. 다행히 내 주변에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었지만 내가 마주한 최초의 사회적 재난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몇 시간 만에 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줬다.

그날의 어머니는 괜찮다고 답했으나 정말 우리는 괜찮은 걸까,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 마음속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어느덧 2014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그날 나는 배낭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현장 내 식당 한 켠에 있는 TV 화면에서 참사의 소식을 접했다. 화면에는 가라앉는 배와 이를 구조하기 위해 둘러싼 구조함과 구조 헬기들이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구조가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305명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70여 명과 기독교·불교·원불교·천주교 등 4대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 시민들이 17일 오후 1시59분 희생자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서울광장 분향소부터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까지 행진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제공
지난해 1월 17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70여 명과 기독교·불교·원불교·천주교 등 4대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서울광장 분향소부터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까지 행진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제공

2022년에는 이태원 압사 참사가 있었다. 자주 가지는 않더라도 가끔 찾아갔던 거리가 누군가의 마지막 자리였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태원을 생활반경에 두었다면? 핼러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태원으로 갔다면?’이런 가정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혐오는 애도할 권리를 짓밟고, 반성할 기회를 막는다

참사는 우리 일상 틈새에 있었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반복된 참사만이 아니었다. 우리사회가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보인 태도 역시 목격했다. 일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는 여행을 가다 당한 불행한 사고로, 이태원 참사는 축제를 즐기러 간 사람들 사이에 생긴 사고로 평가하며 국가 애도 기간을 정해 슬픔을 나눴으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애도를 멈추기를 종용한다.

또 특정정치권은 ‘합의금’을 언급했다. 그러면 어디선가 유가족이 돈에 눈이 멀었다며 혐오발언을 내뱉는 목소리들은 쏟아지고, 국민 전체의 여론인 양 유족들을 향한 혐오가 인터넷에 넘실거렸다. 이런 혐오의 목소리가 넘칠 때 다시 정치권은 ‘사회적 피로감’을 주장하며 사회적 재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재난 피해자 가족에게 또 다른 아픔을 안겨주었다.

4·16세월호,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등 참사 피해자 단체 10여곳은 4일 서울 광화문에서 ‘생명존중 안전사회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신다인 기자
4·16세월호,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등 참사 피해자 단체 10여곳은 4일 서울 광화문에서 ‘생명존중 안전사회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신다인 기자

지난 4일 열린 ‘생명존중 안전사회 시민대회’에서 이정민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유가족들이 돈을 받으려 한다며 또 유족들을 폄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무자비한 이야기들을 차단하고 막아줘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정치적 프레임으로 인해 재난 희생자의 가족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오염된다. 누군가는 노란색, 보라색 리본을 가방에 달며 추모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만하면 됐으니까 그만하라고 소리치거나 나도 힘든데 참는다는 등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혐오발언은 유가족이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발생한 참사 희생자를 애도할 권리를 짓밟는다. 더 나아가 참사가 발생하는 구조를 반성할 기회를 막는다.

2015년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연합뉴스
2015년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연합뉴스

이웃의 손을 잡자, 위로의 힘을 믿어보자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김승섭 서울대 교수는 재난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얘기하며,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와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것임을 얘기했다. 그리고 이 갈등을 잘 봉합하는 것 또한 남겨진 사람들의 숙제라고 했다. 하지만 갈등을 봉합하는 노력 없이 방치하거나 혐오를 부추긴다면 사회 구성원 간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애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애도를 존중한다는 건 어떤 걸까?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이소현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이 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극단을 꾸리며 일어나는 여러 일을 카메라에 다룬 다큐는 애도의 대상은 언제나 연민의 대상, 피해자다움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며 만들어졌다.

감독이 만난 출연자들은 웃고 떠들지만 주인공을 맡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서로 간 갈등도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다큐는 보여준다. 그리고 재난 생존자나 유가족도 공동체를 이루는 이웃이며, 욕망이 주체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1일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세월호 유가족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세월호 유가족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니까 참사 생존자와 유족은 우리와 동떨어지거나 다른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자. 이태원 참사 추모식에서 꽃을 받치는 세월호 유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위로와 애도의 힘을 믿자.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애도기간은 1월 4일부로 끝났지만 여기서 애도가 멈춘 게 아니다.

참사 이후에도 위로와 연대가 필요하다. 세월호 유가족도, 이태원참사 유가족도, 모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 이상 참사 유가족이 없도록”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유족들이 원하는 세상이 오도록 연대하자.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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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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