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사)여성문화네트워크 선정
‘올해의 양성평등문화’ 36선 ③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집요한 공격을 받은 한 해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등불처럼 빛난 문화예술가들과 작품이 있었습니다. 올해 창간 36주년을 맞은 여성신문은 (사)여성문화네트워크와 함께 올 한 해 우리 사회에 존중과 연대의 새바람을 일으킨 ‘올해의 양성평등문화’ 36선을 꼽아봤습니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 땅의 ‘글 쓰는 여자’들에겐 계보가 필요하다. 여성의 성취와 이름을 되새기지 않으면 쉬이 잊히고 지워진다. 지난여름 출간된 『한국 여성문학 선집』(민음사, 전 7권)이 반갑다. 김 소사·이 소사, 김명순, 박화성, 박순녀, 김자림, 고정희, 정복근, 허수경, 김혜순.... 날카로운 지성으로 식민 현실과 개발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을 파고든 여성들의 기록이다.
필진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2012년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국문학자인 김양선 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이선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와 영문학자인 이명호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이희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가 뭉쳤다.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할 계획이라는 이들을 응원한다.

정지선 셰프와 ‘흑백요리사’의 여성들
‘딤섬의 왕’, 정지선(41) 티엔미미 셰프는 올해 요식업계에서 가장 빛난 여성 중 하나다. 중식 경력 20년 차, 한국 최초 여성 중식 스타 셰프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 올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등 예능 무대를 누비며 중식의 매력을 알리고 남성 중심 요식업계 내 여성의 입지를 넓히고자 힘써 왔다.
정 셰프를 비롯해 ‘흑백요리사’의 여성 셰프들은 맛깔나는 요리와 흥미진진한 인생 역정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성 출연자 비중이 20%도 되지 않았고, 뛰어난 셰프들이 이름 대신 ‘어머님’, ‘이모님’으로 불린 현실이 더 아쉬움을 남기는 까닭이다.
“여성 셰프인 제가 TV에 안 나오고 국내 경력만 있다면 후배들이 과연 내 밑에서 배우려고 따라올까. (후배들에겐) 버티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다음 것을 생각하며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버텼으면 한다.” 2019년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정 셰프가 한 말이다. 요식업계의 모든 여성들이 버텨온 시간만큼 새해에는 더 빛나기를 기대한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한국 최초 여성 헤르메스 연기한 최정원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각색한 인기 뮤지컬 ‘하데스타운’ 한국 공연에 올해 최초로 ‘여성 헤르메스’가 등장했다. 뮤지컬 배우 최정원은 이 작품에서 35년 커리어 최초로 ‘젠더프리’ 역할에 도전했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잇는 한국 최초 여성 헤르메스의 탄생이다. 지난 7월부터 11월까지 서울과 부산 공연에서 최정원은 관능적인 몸짓과 재치로, 행간에 눈물이 밴 노래로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남성 배우들과는 또 다른 매혹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동료 배우들을 위해 능숙하게 판을 깔다가도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베테랑의 면모도 빛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
예술의 전당, 선유도공원,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아모레퍼시픽 본사, 제주 오설록.... 정영선의 역사는 우리나라 정원의 역사다. 여든이 넘어서도 현장을 지키는 한국 최초 여성 기술사, 한국 1세대 조경가. 이 대가의 조경 철학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에서 오감으로 체험했다.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라고 그는 말한다. 과연 우리 땅과 풀, 꽃나무의 특성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려 힘쓰는 사려 깊은 시선이 빛났다.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가르친 부처는 페미니스트였다. 인간평등과 해방을 말하는 부처의 가르침이 기원후 1세기경 동아시아로 전파된 이래로 여성은 불교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다. 왕실 여성들, 여성 장인들은 불교미술의 주요 후원자이자 제작자였다. 자비의 보살 관음은 여신의 모습으로 주로 그려졌다. 그런 불교는 어쩌다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종교가 됐고, 여성들은 어떻게 맞섰을까. 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의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한중일 3국의 불교미술을 여성주의 관점으로 재해석했다. 귀한 불교미술 걸작품도 다수 공개해 큰 주목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
‘수 놓는 여성들’의 삶과 작품이 올해 대형 전시로 관객들과 만났다. ‘2024 올해의 양성평등평등문화콘텐츠상’을 받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이다. 근대화, 전쟁과 분단, 산업화 등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 사랑과 소망, 절망과 고통, 저항 등을 한 땀 한 땀 자수에 담은 이들과 그 작품을 조명했다. 여성에게 자수란 전문 기술이자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생각과 철학을 스스로 기록하는 일이었음을 보여줬다.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특한 꽃을 피워 온 한국 자수 문화, 전통을 탈피해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는 현대 자수 작가들도 조명했다.

수원시립미술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전
우리 사회 곳곳을 지탱하나 ‘투명인간’ 취급받는 여성 노동자. 수원시립미술관은 올해 기획전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에서 ‘여자들의 일이 과연 정당한 인정을 받아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권용주, 김이든, 로사 로이(독일), 방정아, 임흥순, 카위타 바타나얀쿠르(태국), 후이팅(대만) 총 8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식민시기 및 급속한 산업화를 겪은 동아시아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비췄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일하는 여성들을 향한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도 빛났다.

다큐 ‘마녀들의 카니발’
‘언니들’의 투쟁과 승리가 없었다면 오늘날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널리 울려 퍼질 수 있었을까. 올해 극장 개봉한 박지선 감독의 다큐 영화 ‘마녀들의 카니발’은 치열한 부산 여성운동사를 조명한다. 제대로 된 월급봉투와 생리휴가를 요구한 ‘언니들’부터 학교 내 성폭력을 고발한 10대들까지, 1990년대부터의 투쟁과 과제를 돌아본다.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에 쏟아진 남성들의 욕설·협박을 ‘사이버 성폭력’으로 처음 명명하고 대책을 모색한 이들도 부산 여성들이었다. “누가 구제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뛰어갈 힘”, 직접 “목소리를 내고, 해결책을 내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게 민주주의”라는 여성들의 말이 힘찬 울림으로 남는다.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올해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 이원식 감독의 다큐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1910~1950년대 일본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일한 조선인 여공 22명의 이야기다. 최하층민 취급을 받고도 살아남아 재일 사회의 기틀이 된 재일코리안 1세대 여성들이다. 영화는 식민 통치와 젠더 권력이 여성들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비춘다. 가혹 노동에 항의하며 야학을 조직하고, 일본인 여공들도 못한 파업과 쟁의에 나선 여공들의 용기와 강건한 자세도 담았다. 강하나, 조청향, 조사량 등 재일 4세 배우들의 출연도 인상적이다.

뮤지컬 ‘마리퀴리’
창작 뮤지컬 ‘마리퀴리’는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는 ‘믿고 보는 작품’으로 통한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여성 이민자라는 사회적 편견, 고난과 역경을 딛고 최초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마리 퀴리의 삶을 그렸다. 지난여름 한국 뮤지컬 최초로 ‘뮤지컬 본고장’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스태프와 배우들로 팀을 꾸려 한 달 넘게 장기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영국 공연 시상식 ‘더 오피스(The Offies)’에서 신작 뮤지컬 작품상, 주연상 후보로도 올랐다.

음악극 ‘섬: 1933~2019’
1930년대 일제의 명령에 의해 소록도로 끌려간 한센병 환자 백수선, 1960년대 소록도에 가 한센병 환자들을 보살핀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리고 2019년,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엄마 고지선. 음악극 ‘섬: 1933~2019’은 각각의 시대가 낳은 ‘섬’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박소영 연출가, 이선영 작곡가, 장우성 작가가 힘을 합쳐 사회에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을 재조명하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결실 중 하나다. 모든 배역은 1인 다역이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편견, 차별, 그 속에서도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정순’ 정지혜 감독
정지혜 감독의 데뷔작, 영화 ‘정순’은 디지털 성범죄를 겪은 중년 여성, 공장노동자 정순의 이야기다. 인간적인 수모와 모멸을 감당하던 한 여성의 결단을 힘 있게 담아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22년 제17회 로마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여우주연상,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전 세계 19개 영화제에 초청돼 8관왕에 올랐다. 정 감독은 올해 극장 개봉한 이 작품으로 ‘2024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신진문화인상’을 받았다.

황보화 신나는여성주의도서관 ‘랄라’ 도서관장
누구나 안전하게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황보화 관장이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전국 유일 ‘여성주의 도서관’을 만든 이유다. 2003년 설립돼 오랜 기간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맡았던 신나는어린이도서관을 2017년부터 ‘신나는여성주의도서관 랄라’로 바꿔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페미니즘, 성평등 도서를 포함해 2천500여 권의 서적을 갖췄다. 누구나 와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소통할 수 있다.

김지예 LG야구단 전력분석원
야구는 남성의 영역이란 편견을 깨고 프로야구단에 입사, 전력분석 전문가로 활약하는 여성이 있다. 김지예 LG야구단 전력분석원이다. 올해 LG야구단 창단 이래 여성 최초로 1군 해외 캠프에 합류해 주목받았다.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그는 2021년 LG 야구단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 최종 면접에서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었고, 지난해 4월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박혜정 역도선수
대한민국 역도 국가대표 박혜정은 올해 ‘한국 역도 간판’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8월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급에서 합계 299㎏(인상 131㎏, 용상 168㎏)으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지난 15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용상 종목에서 171㎏을 들어 올려 한국 신기록을 썼다. ‘포스트 장미란’이라는 별명 대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리고 싶다는 그의 발걸음에 기대가 쏠린다.

EBS ‘딩동댕 유치원’ 이지현 PD
이지현 PD가 연출하는 EBS ‘딩동댕 유치원’의 새 부제는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다. 2022년부터 휠체어를 탄 ‘하늘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 ‘별이’, 다문화가정 아동 ‘마리’, 태권도를 좋아하는 여아 ‘하리’, 문학소년이자 조손가정 아동 ‘조아’, 유기견 ‘댕구’ 등 소수자 정체성이나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선보였다. 올해 2월 프로그램 최초로 유아 성교육 특집을 방송해 주목받았다.

영화 ‘메아리’ 임유리 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소속 임유리 감독이 22분짜리 단편영화 ‘메아리’로 올해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섹션에 초청받았다.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를 선보이는 경쟁부문에, 졸업 작품이 아닌 첫 연출작으로, 한국 작품으론 유일하게 칸의 초청장을 받았다. ‘메아리’는 술 취한 남자들에게 쫓겨 금지된 숲으로 도망친 여자 옥연이 몇 년 전 마을 영감과 혼인한 앞집 언니를 만나면서 여성으로 사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시대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