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뒷전으로 취급된 역사는 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처럼, 오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부차적인 것, 한낱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여성의 목소리는 세상을 바꿔왔다. 성폭력 특별법 제정 운동과 호주제 폐지부터 불법촬영물 시청이 처벌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이 그 성과다. 모두 ‘암탉’이 지치지도 않고 울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가, 분노가 사소한 것처럼 취급되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아야 한다.
지난달 8일부터 동덕여대 총학생회는 ‘공학 전환 철회’를 요구하는 행동에 나섰다.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대자보 부착, 서명운동, 필리버스터, 피케팅 등의 활동을 개진한 것이다. 3일 전인 5일 동덕여대 대학비전혁신추진단에서 대학 발전 방안에 ‘남녀 공학 전환’이 회의 내용에 포함된 것이 발단이었다. 11월 11일, 수 차례의 요청 끝에 약속된 대학 처장단과의 면담이 대학 본부 측의 취소로 결렬되자, 총학생회는 대학 본관을 점거하고, 수업을 거부하는 등 적극 행동에 나섰다.
해당 사건이 잇달아 보도되고, 온갖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하나같이 동덕여대 학생들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현 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서울 ㄷ여대 학생들’을 언급하며 ‘가능하다면 이 대학 출신은 걸러내고 싶다’고 SNS에 글을 게재하기까지 했다. 불법과 손해배상을 언급하며 학생들을 법률로 위협하는 콘텐츠도 쏟아져나왔다. 또한 일부 누리꾼들은 ‘공부하는 대학생이 그러면 안 된다’는 식으로 학생들을 계도하려 들거나, ‘시대가 어느 때인데’라는 식으로 한 소리 거드는 듯 한 반응으로 이번 사안을 젊은 여학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폄하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 가운데 학생들이 적극 행동에 돌입한 까닭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여성이 자율성과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학원,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을 형성할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한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안전과 평등에 대한 열망에 주목하는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작년 동덕여대 교내에서 재학생이 트럭에 치여 숨진 사고로 촉발된 대학 본부의 비민주적인 소통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가려졌다.
해당 사안을 폭력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숙고와 시민의 권리보장에 대한 담론이 무너져 내린 세태를 상징한다. 라카칠을 했다는 것보다 왜 라카칠을 했는지가 주목돼야 한다. 물론 ‘라카칠 조차’ 할 필요 없이 사안이 해결되면 좋다. 그런데 의사결정권을 가진 대학 본부는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그 시기를 놓쳤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크게 뒤바뀔지 모르는 결정 앞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으며, 여러 번의 소통을 위한 시도 역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된다’는 보편타당해 보이는 말은 어떤 상황에 쓰이는 가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이 말의 반대는 ‘폭력을 써도 된다’가 아니라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 알아보는’ 사유다. 이것이 너무나 쉽게 자본과 권력이 사회 구성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오늘날 시민이 견지해야 할 태도다. 근본 원인에 대한 통찰 없이 덮어놓고 ‘폭력은 안 되지’만을 읊조리는 태도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개개인의 노력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는 기득권의 힘과 정치에 놀아난 나태일 뿐이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계보에서 대학가의 기여도는 지대하다. 군부 독재라는 억압의 맞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투쟁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이때 군부 정권은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으로 뭉친 대학생들에게 ‘폭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항간에는 ‘기껏 힘들게 공부시켜 대학 보내 놓았더니 데모짓이나 하고 있다’는 말들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가지는 무게를 체감하지 못했고, 학생을 기성사회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담겨있는 언어였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는 말이 있었다. 불량하고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물론 이때도 일왕의 은덕을 따르지 않는 폭도라는 의미로 쓰였다. 대륙을 건너가면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가 있다. 흑인의 정당한 참정권 요구에 백인 중심 사회는 ‘폭력적인 정치 선동’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엄연히 당시 법제도에 따른다면 위 모든 운동은 불법이었다. 우리는 한국 민주화 운동, 일제에 맞선 독립 운동, 흑인 참정권 운동을 폭도의 역사로 기억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기득권의 억압과 차별에 맞선 투쟁과 시민운동으로 배운다. 왜냐하면 시민,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위해 그 권리를 짓누르는 부조리에 저항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동덕여대의 사안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온순할 것, 다시 말해 착하고 예쁘게 굴 것, 친절하고 다정하게 기다리라는 말은 이들이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버밍햄 감옥에서 쓰인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부정된 것이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가진 긴급함과 중요성에 귀 기울여야 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목소리를 짓누르는 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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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