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폭력규탄공동행동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앞 도로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6천여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여성혐오폭력규탄공동행동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앞 도로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6천여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지난 21일 혜화역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에 다녀왔다. 딥페이크 성착취 이슈가 빨리 사그라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한 켠으로 나처럼 분노하는 여성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가보니 드레스코드인 검은색 옷을 입은 여성들이 마로니에 공원 앞 차도에 300m에 걸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주최 측 추산 6000여명에 달하는 숫자다.

이날의 시위에서 선보인 ‘테무에서 산 경찰, 사법부, 국회’라는 퍼포먼스는 지나가던 총천연색 옷의 시민들도 멈춰 세웠다. 퍼포먼스는 딥페이크 성착취를 묵인하고 방조해온 경찰과 사법부, 국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가해자를) 찾기 힘듭니다”라는 경찰, “편집이 그렇게 실제 같지 않은데요. 조악하니까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 “법안 발의하겠습니다. 기자회견 하겠습니다”라며 수년 째 말만 요란한 국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 장면들에서 최근에 읽은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를 떠올렸다. 책에서 무수히 맞닥뜨린 풍경들이기 때문이다. 책은 과거에는 ‘마녀’, 현재는 ‘D’인 반성폭력 활동가가 썼다. 자신 또한 성폭력 피해자였던 D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분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부터 다른 피해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대해왔다. 여성을 향한 성착취를 ‘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해 온 이들이 22만 여명 가담한 딥페이크방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이때 필연적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이러한 현실에 즉답을 주는, 그런 책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현재도 ‘X’에서 성범죄 수사 재판에 관한 한 가장 빠른 소식통인 D의 책을 꺼내 들었다.

ⓒ동녘
ⓒ동녘

책은 D의 경험에서 ‘끌올’해, 왜 여성들이 성범죄 수사와 재판을 현현한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지를 설파한다. D가 입었던 성폭력 피해 사건의 경우, 경찰에서 검찰로 불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가 검찰 조사를 거쳐 어렵사리 기소가 됐다. 외부 전문가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던 D는 ‘공판검사만 믿기가 불안해서 혼자 재판 방청을 시작했다’.(348쪽)

형사 사법절차에서 피고인(가해자)과 피고인 변호인, 범죄 입증 책임을 지는 검사가 아닌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철저히 배제된다. 대신 그는 재판장 한 구석에 앉아 피해자인 자신의 개인 정보를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피고인 측에 바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러자 피해자가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판사와 공판검사, 피고인 측 변호인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비법조인인 D는 성범죄 피해 당사자의 시선으로 연대하는 익명의 활동가가 된다.

특히나 무조건 내 편에 서줄 것이라 믿었던 수사기관에서 겪는 피해자의 고초는 상상 그 이상으로 펼쳐진다.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 위협에 처한 D는 경찰서에서 “당하면 오세요.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20쪽) 라는 말을 들었다. 이는 서울대 동문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루마가 텔레그램 대화창에서 실시간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에 경찰서에서 “사진을 캡처해 고소장에 첨부해서 제출하라”는 말을 들었던 일과 겹쳐진다. D는 이처럼 경찰과 검찰 같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안일한 태도와 인식, 입법에의 의지가 없는 국회,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에 적극 가담하는 언론까지 전방위적으로 지적한다.

21일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나라를 향해 거침없이 포효하는 한녀들이 왔다’'는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있다. ⓒ이슬기 칼럼니스트
21일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나라를 향해 거침없이 포효하는 한녀들이 왔다’'는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있다. ⓒ이슬기 칼럼니스트

꾹꾹 눌러쓴 생존서에 가까운 책을 읽다 보면 그 무게에 눌려 절로 ‘왜 여자들만 나서야 하지?’라는 생각마저 떠올랐다. 이 의문은 집회 단상에 오른, 고등학교 2학년 여성 청소년의 말에서 해소됐다. 그는 “낙인이 찍힐까봐, 조롱을 당할까봐 솔직히 이곳에 올라오는 것이 두렵다”고 운을 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곳에 올라온 이유는 혼자 슬퍼하고, 혼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떨리던 목소리엔 훨씬 기운이 더해졌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 대한 저희의 분노를, 슬픔을, 두려움을 자주 주제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착각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실 겁니다. 저희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람답게, 착취당하지 않고 살기 위한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그 자리에 걸음한, 여성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D는 연대자를 ‘피해자의 그림자’로 표현한다. 본체인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때로는 앞으로 나서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비유다.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말은, 그 모든 연대를 이으면 또 하나의 길이 보이리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날 도로를 가득 메운 검은 여성들의 물결이, 그림자를 이은 길처럼 보였다. 피해에 공감하고, 행동을 도모하고, 전략을 수립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길. 개중에 붉은 글씨로 적힌 피켓 하나가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 표현으로 쓰이는 ‘나거한’(나라 전체가 거대한 한녀)을 전복한 글귀였다. ‘나라를 향해 거침없이 포효하는 한녀들이 왔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