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에 성별 특성 반영 ‘젠더 혁신’
국내에 처음 알린 1세대 수학자
여성 이공계 인재들에 ‘날개’
달아준 교육자이자 운동가

미국·유럽, 성·젠더 고려 필수로
세계적 학술지 게재 시에도
성·젠더 평가 반드시 포함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이하나 기자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이하나 기자

“과학계의 ‘젠더 혁신’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유럽은 이미 연구 전 과정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의무화했고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여성 건강증진 연구에 재정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어요. 한국도 과학기술 젠더혁신에 나서야 해요.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국내 과학계를 향한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의 진심 어린 조언이다. 이 소장은 국내 대수학 분야의 기초를 정립한 원로 수학자이자, 1980년대부터 여성 수학 인재를 길러온 교육자다. 여성 이공계 인재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반평생 열정을 쏟아온 그를 운동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40년 넘게 여성의 과학 분야 참여를 독려하고 제도를 만들어 정책 변화까지 이끌어 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여성 과학자 육성 위해 시작한
‘WISE’ 국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이화여대 수학과 교수 시절 개발한 ‘와이즈’(WISE·Women Into Science and Engineering) 프로그램이다. 여성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중고등학생이 이공계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선배 여성 과학자가 멘토가 돼 조언을 해주고, 필요한 지원과 프로그램을 센터에서 지원해 인재 풀을 늘리는 데 앞장서 왔다. 처음에는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아 시작한 사업이다.

이 소장은 “뜻이 맞는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프로그램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와이즈 프로그램은 2002년 드디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소장이 와이즈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는 하나였다. 제자들이 전공을 살려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활약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제자가 있어서 주변 교수들께 채용을 권한 적이 있어요. ‘이런 분야에 이 정도 성과를 낸 신진 수학자가 있는데, 채용하면 어때요?’ 처음에는 다들 좋다고 해요. 그러다가 제자가 ‘여자’라고 하면 단박에 ‘노(No)’라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여자는 불편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다시 되물었죠. ‘교수님이 배웠던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는 여성 과학자가 없었나요’라고요. 해외에서 대놓고 여성을 차별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거든요.”

인천여중·인일여고 스승인 강순옥 선생님 덕분에 자신이 수학자의 길로 들어섰던 것처럼, 자신을 통과해 더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에 참여할 수 있길 바랐다. 그의 꿈은 더디지만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그가 이화여대 수학과에 입학했던 1967년 당시 재학 중이던 수학과 학생은 전국에 1440명, 이 가운데 여성은 260명에 불과했다. 50년이 지난 현재 이공계 대학 여성 입학생 비율은 31.3%, 재학생 비율 31.4%(자연 52.1%, 공학 23.3%)로 크게 늘었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22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활용 실태조사’).  

신약 개발 과정서 ‘수컷’만 실험
여성에 부작용 더 많이 나타나

한국에 ‘과학기술 젠더 혁신’ 개념을 처음 알린 것도 이 소장이다. 젠더 혁신은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과 젠더의 특성을 반영하면 모두를 위한 발견과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개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론다 시빙어 교수가 2005년 처음 이 용어를 만들었다. 국내에는 2013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현 여성기술인육성재단) 초대 소장이던 이 소장은 학회에서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를 “정말 놀라운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그간의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공정하리라 여겨왔지만, 젠더 혁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연구개발 단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젠더 편향이 이뤄지고 있어요. 가장 많이 알려진 사례가 신약 개발 과정에서 수컷만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실제로 1997~2000년 미국에서 시판되던 약물 10개가 심각한 부작용으로 시장에서 퇴출됐다. 그 중 8개가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났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중 8개가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8개 중 4개가 여성에게 더 많이 처방되긴 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국 정부가 조사해 보니, 신약 개발 과정에서 수컷을 대상으로 세포실험이나 동물실험을 하고 임상시험에서도 여성은 소수만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졌어요.”

이후 성별 부작용이 드러난 약물이 600여개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구에서의 성별 특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 소장은 “연구 그룹에 여성이 더 많았다면, 리더십 위치에 여성이 더 많았다면, 수컷만 대상으로 삼은 동물실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품게 됐다. 

아마존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
‘여성’ 단어 있으면 채용 차별

의생명 분야뿐 아니다. 최근 널리는 쓰이는 인공지능(AI)의 젠더 편향 문제도 뜨거운 이슈다. 2018년 아마존은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AI) 채용 프로그램에서 성차별 논란이 불거지자, 결국 중단했다. 사람의 편견이 작동하지 않아 객관적으로 인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패했다. 아마존 채용 시스템은 자사의 10년간의 인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발된 AI가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채용 적합도를 판단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력서에 ‘여성’을 유추할 수 있는 단어가 포함돼 있으면 채용 대상에서 배제하고 남성 지원자 서류만 뽑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AI 채용 시스템에서도 ‘성차별 편견’이 스며든 까닭이다. AI 개발에 학습용으로 사용된 데이터가 이미 편향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젠더 혁신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다”. 이 소장은 남성에게도 불리한 연구결과가 많다고 했다. 대표적인 질병이 골다공증이다. 골다공증은 백인 여성을 기준 삼은 골밀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남성에게 노출된 위험 요소나 진단 기준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중년 여성의 질병이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남성 골다공증 환자의 진단이 늦어져 조기 치료를 어렵게 만든다. 젠더 혁신 연구 결과 남성에게 빈번한 골다공증성 골반 골절에 진단 방법과 치료법이 개발됐다. 협심증이나 자폐증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소장은 “과학기술의 연구개발 전 과정에서 성별과 젠더 특성을 반영하는 젠더 혁신은 남녀 모두를 위한 더 좋은 혁신”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협상은 지난 3월 25일 타결됐다. 협정 체결 절차가 차질 없이 진행되면 2025년부터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이 된다. 사진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국의 가입 협상 타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과 일리아나 이바노바 호라이즌 유럽 집행위원(왼쪽). ⓒ과기정통부
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협상은 지난 3월 25일 타결됐다. 협정 체결 절차가 차질 없이 진행되면 2025년부터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이 된다. 한국은 ‘글로벌 문제 해결’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세부분야(Pillar) 2에 한정해 준회원국으로 가입한다. 사진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국의 가입 협상 타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과 일리아나 이바노바 호라이즌 유럽 집행위원(왼쪽). ⓒ과기정통부

138조원 투입 ‘호라이즌 유럽’도
성평등 계획·성별균형평가 의무

세계적 학술지와 연구비 지원 단체도 젠더 혁신을 반영하고 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2019년 동물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별 특성 등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다. 세계 3대 의학저널 ‘랜싯’은 연구 및 출판 영역에서 성평등, 다양성 및 포용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성 서약을 시행하고, 남성 위주의 패널 금지 정책도 펼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2016년부터 연구비를 신청할 때 척추동물의 경우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여성 건강증진 연구에 재정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도 연구개발의 젠더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이 소장은 말했다. 최근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참여부터 시작하자는 구체적인 제안도 내놨다.

‘호라이즌 유럽’은 유럽연합(EU)이 2021년부터 7년간 955억 유로(약 138조원)를 지원하는 세계 최대 다자간 연구혁신 프로그램이다. 한국은 비유럽 국가에서 뉴질랜드, 캐나다에 이어 세 번째 준회원국으로 내년부터 참여한다. 건강, 안보, 우주, 기후, 포용적 사회를 위한 연구에 지원비를 받을 수 있다. 좋은 기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설명대로 선진화된 연구 시스템을 습득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이 소장은 “준회원국인 한국이 재정 분담금을 내면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호라이즌 유럽 연구비를 직접 활용할 수 있게 돼 다자간 과학기술 연구협력 네트워크 확대와 국가혁신시스템 개방성 혁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이 기회를 얻으려면 젠더 혁신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호라이즌 유럽’은 모든 연구기관이 성별 균형을 개선하기 위한 ‘성평등 계획(Gender Equality Plan)’을 수립하고, 모든 연구 프로젝트는 구성원의 성별 균형과 연구주제의 성별 편향 여부를 평가하는 ‘성별 균형 평가(Gender Balance Assessment)’를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도 과학기술기본법에 성별 등 특성을 고려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기술영향평가 등에도 반영하도록 하고 있어요. 제5차 과학술기본계획에도 이 내용이 반영됐지만 연구자 자율에 맡기고 있어 실제 연구 현장에선 거의 적용되 못하고 있어요. 세계 주요 국가들과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함께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젠더 혁신이 그 출발선입니다.”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이하나 기자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이하나 기자

*과학기술 젠더 혁신이란?

과학기술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s)은 연구개발 전 과정에 여성과 남성 간 생물학적·생리학적 변수는 물론 사회·문화적 변수도 함께 고려하는 과이다. 과학 기술 연구와 제품 개발에 성별·젠더 분석을 활용해 편향성 없는 연구로 과학 기술의 적정성을 높이고자는 취지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