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여성 독립운동 Ⅰ- ②독립운동가의 아내]

부인이 가족 먹여살려
독립자금 같이 모았지만
남편 이름만 기록에 남아

“여성 없는 반쪽짜리
독립운동 기록“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기념 사진 속 민영애 선생. 민선생의 아버지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인 민필호 독립운동가는 딸과 부인의 이름을 한국독립당 당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1945년 11월 3일 환국 20일 전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속 민영애 선생. 민선생의 아버지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인 민필호 독립운동가는 딸과 부인의 이름을 한국독립당 당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독립운동 기록에 남지 않은 여성들. 빼앗긴 대한민국을 되찾기 위해 남편과 함께 현장 곳곳에서 손발이 되고 눈과 귀를 자처했던 부인, 딸, 며느리들이다. 또 독립운동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가족을 책임지고 돌본 ‘가장’이기도 하다. 이제는 부부를 함께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성계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후손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여성 독립유공자는 2018년 기준 357명이다. 전체 유공자 1만5180명의 2.4%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가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을 강조하면서 지난해 한꺼번에 60명이 늘어났다. 독립운동 하면 남성들만의 활동을 연상시키는 것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이다. 문제는 여성의 역할이다. 숫자상으로 보면 당시 남성이 독립운동을 할 때 여성은 ‘뒷짐 지고’ 있었던 셈이다.

여성들의 공적이 독립운동으로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는 지극히 남성의 시각으로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여성계는 현재의 독립운동의 의미나 평가 기준은 남성의 시각에서 재구성된 것이고 여성의 시각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남성의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여성들의 공적을 입증할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처럼 남성의 이름이 기본값처럼 사용돼왔거나, 같은 일을 해도 남편의 이름만 남는 경우도 많다. 혹은 독립운동 조직 내 여성의 역할 자체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돼 기록이 남지 않았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지난해 1월 ‘3·1운동과 여성’ 정책토론회에서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직접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이름을 남긴 경우도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독립운동에 기여한 경우도 있을 것”이라며 “우리 민족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참여없는 독립운동은 반쪽짜리 독립운동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윤옥 시인이 출간한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에 실린 여성 300인 중 남편이 독립운동가로 확인된 이만 약 25%인 77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만5천 여명 중에서는 약 3750명이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이제 평가를 위한 평가가 아닌 내 가족, 내 나라, 내 국민을 살리겠다는 희생정신을 제대로 평가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쓰기 위해서는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들의 돌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독립운동가의 배우자에게도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희선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지난해 쿠바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 3세 안토니 킴에게서 “(증조)할아버지만이 아니라 (증조)할머니도 독립운동가로 불러달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1900년대 초 미주로 건너온 할아버지는 지옥같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을 상하이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낸 공적으로 서훈을 받았지만 함께 일하며 돈을 모았던 할머니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를 찾는다는 돈인데 내가 무슨 일을 못하랴’고 했다는 할머니의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안토니 킴은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면서 독립자금을 보냈던 당시 할머니의 정신에 대해 고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름도 없이 빛도 보지 못한 채 간 그 할머니들의 이름을 후세가 기억해주자는 것”이라고 했다.

또 중요한 것은 직접 투쟁의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당시 집안의 남성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면 여성들도 집에만 머물 수 없었고 어떤 식으로든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가령 아기를 업고 친일파 관련 전단지를 밀정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거나, 시장 바닥에서 오가는 정보를 듣고 전달하는 역할은 남자 보다 여자가 더 잘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총을 전달하기 위해 업고 날라서 나무 밑에 숨기기도 했다.

허은은 ‘서간도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불렸다. 열여섯 살, 독립운동 명문가로 꼽히는 안동 고성 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서 그의 독립운동 뒷바라지가 생활이 됐다. 시할아버지는 군사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운영한 이상룡이며,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의 독립운동도 기록에 남았지만 허은이라는 이름은 이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은 “가족의 일원으로 헌신한 수많은 여성들의 공헌은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독립운동가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어머니, 며느리, 아내, 딸들의 살림살이, 경제적 보좌가 없었다면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을까? 여성의 역할이 그저 보조적인 수단이었고 그들의 역할이 단순한 도움에 그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거듭 질문했다. 이어 “힘들고 어렵기 짝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고 극복해 갈 수 있었던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재평가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그걸 위해 우리 후세 여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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