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돌아 처음으로… 팬들에게 작은 위로 됐으면”
“먼 길 돌아 처음으로… 팬들에게 작은 위로 됐으면”
  • 박길자 기자
  • 승인 2016.08.24 13:20
  • 수정 2016-09-04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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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명곡 ‘개여울’의 주인공, 37년만에 가요계 복귀

가수 최백호 권유 받아 3년 준비 끝에 새 앨범

“‘37년’은 어른의 음악… 인생 3라운드를 위한 신곡 11곡 포함”

 

“노래로 다시 스타 되겠나, 돈을 벌겠나… 내 노래로 힐링 됐으면”

 

37년만에 가요계에 복귀한 가수 정미조가 서울 서초동 자신의 화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CD 발매 기념콘서트장에서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팬들이 고맙더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37년만에 가요계에 복귀한 가수 정미조가 서울 서초동 자신의 화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CD 발매 기념콘서트장에서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팬들이 고맙더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청바지에 줄무늬 재킷을 입은 가수 정미조(67)가 37년이란 세월을 가로질러 ‘훅’하고 다가왔다.

“당신은 무슨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하략)”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다”

낮은 목소리로 ‘개여울’을 들려주었던 정미조는 1970년대의 스타 가수였다. 37년만에 서울 서초동 화실에서 마주한 정미조는 대학교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22년간 대학생을 가르쳤던 이답게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복귀 소감을 들려줄 땐 마치 연구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가난했던 유학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몇천원짜리 옷을 입고 파리 상젤리제 화랑가를 돌아다녔다거나 요즘도 시장에서 옷이나 구두를 득템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스타라기보다 큰언니처럼 부담 없이 친숙했다.

화실에는 3년 전부터 그리고 있는 100호짜리 유화 ‘서울야경’이 미완성 상태로 놓여 있었다. 요즘 눈이 불편해져 병원 치료 중이라 그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정미조는 이제 60대 현역으로 무대에서 팬들과 만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꿈은 노래가 전부가 아니다. 그는 뮤지컬로 팬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뮤지컬이 전무하다시피하던 세대에 가수 활동을 했다. ‘살짜기 옵서예’만 기억난다. 난 춤을 좋아하고 즐긴다. 지금도 댄스스포츠를 수년째 하고 있다. 라임댄스도 무척 좋아하고…. 드라마틱한 목소리도 낼 수 있는데 그땐 뮤지컬을 할 기회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노래를 열심히 하다보면 뮤지컬 할 기회가 언젠가 올까?(웃음)”

 

1978년 동경국제가요제 최우수가창상 수상 모습.
1978년 동경국제가요제 최우수가창상 수상 모습.

 

1975년 앙드레김 콜렉션에 모델로 출연했을 때.
1975년 앙드레김 콜렉션에 모델로 출연했을 때.

 

2007년 개인전 당시 작품 앞에 선 정미조.
2007년 개인전 당시 작품 앞에 선 정미조.

정미조에겐 신이 주신 달란트가 두 가지 있었다. 노래와 그림.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다닐 당시 그는 “노래 잘하는 학교 스타”였다. “정미조를 모르면 가짜 학생”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패티김으로부터 가수 데뷔를 제안받았다. 1969년 5월 31일 이대 메이데이 축제 무대에 선 그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 ‘왓 나우 마이 러브(What Now My Love)’와 위키리의 ‘종이배’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초대가수 패티김이 그를 불러 세웠다. “너 노래 정말 잘하는구나. 내 쇼에 나오지 않을래? 매주 게스트로 출연시켜 줄게.”

당시 주말 황금 시간대에 방송하던 패티김 쇼는 요즘으로 치면 ‘무한도전’ 이상의 인기를 얻고 있던 최고의 TV 예능프로였다. 그러나 학칙상 방송활동을 하면 바로 퇴학이었다.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스물세살의 정미조는 TBC TV ‘쇼쇼쇼'로 데뷔해 ‘마이 웨이’를 불렀다. 패티김을 잇는 대형 가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불과 7년. 그 짧은 시간에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그리운 생각’ 등 주옥 같은 히트곡을 줄줄이 쏟아내며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개여울’은 김소월 시에 곡을 붙인 것이고, ‘휘파람을 부세요’는 이장희, ‘불꽃’은 송창식 작품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들이다.

데뷔 첫해 KBS TV 신인무대에서 8주 연속 우승했고, MBC와 TBC TV 신인가수상을 휩쓸며 3대방송을 모두 석권했다. 이후 MBC TV 10대 가수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소월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대표곡 ‘개여울’은 한국 가요사가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명곡이다. 영화 ‘모던보이’에서 김혜수가 부른 것을 비롯해 심수봉, 적우, 왁스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그런데 고지식한 탓일까. 운명의 갈림길에서 가수를 접고 화가의 길로 갔다. “3년만 가수를 하려고 했는데 7년을 했으니 많이 한 거다.” 정미조는 기자 앞에서 파안대소하면서 “왜 그랬는지 몰라, 성공의 정점에 있었지만 나는 화가가 돼야 한다고 다짐했으니까”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 이후 70년대의 디바는 파리에서 가난한 유학생 생활을 13년이나 이어갔다. 그리고 2016년, 가요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새 앨범과 함께 대중에게 왔다. 앨범 제목은 ‘37년’. 새 앨범엔 신곡 11곡과 본인의 히트곡을 재해석한 2곡 등 모두 13개 트랙이 담겨 있다. 발라드부터 탱고, 보사노바, 볼레로까지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다. 그리고 ‘어른의 음악’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 컴백 앨범은 그저 옛 히트곡을 반추하는 황혼의 앨범이 아니다.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 외 11곡은 모두 인생 3라운드를 시작하는 정미조를 위한 신곡이며 두 동행자(이주엽·손성제)들의 치열한 뮤지션십을 감안할 때 결코 옛 명성과 어정쩡하게 타협한 기획 상품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평했다.

 

가수 정미조가 3년 전부터 그리고 있는 100호짜리 유화 ‘서울야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가수 정미조가 3년 전부터 그리고 있는 100호짜리 유화 ‘서울야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최고의 절정에서 가난한 유학생이 되는 길을 왜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가수로 인기 절정을 달리던 시절, 나는 내면의 꿈틀거림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다. 그 꿈틀거림의 응어리를 폭발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세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1979년 9월의 어느 날, TBC TV의 인기 프로그램 ‘쇼쇼쇼’에 세상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가수 정미조가 은퇴를 선언하고 고별 콘서트를 하던 날이었다. 정미조는 그 자리에서 가수 생활을 접고, 원래 계획했던 화가의 길로 떠난다며 파리 유학을 선언했다. “그땐 내 전공을 계속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계속 나는 그림을 해야만 한다, 내 전공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나이까지 전공대로 살아온 거다.”

화려했던 가수 생활을 접고 건너간 파리에서의 나날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유배지 같은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었으며 “성공의 꿈에서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유학 중 파리 평론가들이 뽑은 젊은 작가전에 초청받고, 칸느 아쥐르 국제그랑프리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3년 파리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20여 차례 개인전과 100여 차례 단체전을 열었으며 한국에서 22년간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화가로서의 꿈도 어느 정점에 다다랐다.

그러자 오랫동안 접어뒀던 가수의 꿈이 살아났다. 오래 전 가수에서 화가의 길로 등을 떠밀었던 운명은 정미조를 다시 가수의 길로 이끌었다.

-가요계 복귀가 두렵지는 않았나.

“긴 공백 탓에 두려움이 컸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은 많았지만 노래에 대한 간절함을 이길 수 없었다. 가수는 소리가 생명 아닌가. 사실 목소리가 안 나오면 끝인데 막상 노래해보니 목소리가 나오더라. 그래서 복귀한 거다. 제가 활동하면서 콘서트를 한 번도 제대로 못했다. 리사이틀이라지만 옴니 스타일이거나 극장쇼 정도였다. 방송 위주로 활동했다. 그런데 37년만에 복귀한 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으니 너무 큰 행운이자 축복이다.”

-언제부터 음반을 준비했나.

“3년 전 가수 최백호씨와 우연히 점심을 먹었다. 그때 최백호씨가 대뜸 ‘목소리가 좋은데 왜 노래를 안 하느냐’고 하더라.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최백호는 정미조에게 음반 제작자 이주엽을 소개했고, 재즈 음반을 주로 내온 이주엽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를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내세워 음반을 만들었다. 정미조는 “손성제 호원대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복귀했을 지 의문이다. 프로듀서를 찾느라 1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다시 팬들을 만난 소회는.

“4월 10일 LG아트센터에서 CD 발매 기념콘서트를 열었다. 44년만의 첫 콘서트였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사인회를 하려고 보니 CD를 사든 팬들이 LG아트센터 계단 위까지 길게 줄을 섰더라. 저 분들 어떻게 다 사인하지? 너무 막막했을 정도다(웃음). 마지막 사인을 마치고 나니 밤 11시였다. 한시간을 기다렸다는 젊은 남자팬을 잊을 수가 없다. 스물두살 청년이더라. 이분이 ‘개여울’을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아 또 한 번 놀랐다. 70대 여성팬은 예전에 내 노래가 좋아 공개방송은 모두 쫓아다녔다더라. ‘저 기억 못하세요’ 하는데 나이든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나.

“다시 복귀했다고 내가 스타가 되겠나, 돈을 벌겠나. 그런 욕심은 없다. 예전엔 신나서 노래를 불렀다면 수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인생에서 묻어나는 흔적이 제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싱어송라이터인 김동률씨가 ‘37년’ CD가 나오자마자 페이스북에 ‘좋은 곡이 있다’고 올려놓았더라. 팬들이 음악을 찾아듣곤 댓글도 달았더라. 만난 적도 없는데 감사했고 큰 용기를 얻었다. 앞으로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정미조는 담담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는 그런 음악을 할 것”이라며 “내 노래를 들으면 힐링이 된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가수 정미조는 털털했다. 가난했던 유학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몇천원짜리 옷을 입고 파리 상젤리제 화랑가를 돌아다녔다거나 지금도 시장에서 옷이나 모자를 득템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큰언니처럼 부담 없이 친숙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가수 정미조는 털털했다. 가난했던 유학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몇천원짜리 옷을 입고 파리 상젤리제 화랑가를 돌아다녔다거나 지금도 시장에서 옷이나 모자를 득템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큰언니처럼 부담 없이 친숙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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