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제도 사각지대

생계형 체납자 지원 시급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병원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러스트 이재원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병원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러스트 이재원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병원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생계형 체납자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또 재산은 물론 자동차와 예금까지 압류를 행사해 사실상 경제활동을 마비시키는 추심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대 A씨는 임신 3개월에 접어들었지만, 건보료가 미납돼 고운맘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취업을 준비 중이었던 A씨는 생활이 어려워져 병원에 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40대 B씨는 사업실패로 힘든 시기를 보내다 정규직 직장에 자리를 잡으면서 건보료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 밀린 보험료 때문에 통장이 압류될 위기다.

30대 D씨는 6세 여아를 홀로 키우는 한부모다. 남편의 폭력으로 아이가 6개월 때부터 쉼터를 전전한 그는 단돈 100원의 수입도 없었지만 의료 보험은 계속 부과됐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그는 계속 체납보험료 강제징수 독촉 안내장을 받고 있다.

20대 F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건보료가 체납됐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는데 보험료가 미납됐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결혼하고 나서야 300만원을 납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건강보험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매년 늘고 있다. 현재 건보료를 6개월 이상 내지 못해 체납된 가구는 약 140만 가구로 이들 중 대부분은 저소득층이다. 또 소득, 전·월세 등 재산이 없어 생활고로 건강보험이 체납된 월 5만원 이하 체납 가구도 94만 가구에 이른다. 체납자 대부분이 ‘생계형’인 것이다.

체납세대의 절반인 75만965세대는 월 보험료 2만원 이하인 저소득층 가구로 평균 체납액은 95만원이다. 65세 이상 노인과 한부모가정, 55세 이상 여자단독세대, 소년가장세대, 70세 이상 노인, 장애인 등은 월 소득 30만원 이하인 경우에만 지역보험료를 10~30% 경감받는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득을 받는 경우만 지원해주는 것이다.

6개월 이상 건보료를 연체하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일단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보험 혜택에 해당하는 비용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다시 내야 해서 결국 비싼 병원비를 물게 되는 셈이다.

생계형 체납자 지원 캠페인 ‘60일의 건강보험증’을 진행하는 아름다운재단은 “흔히 건보료 체납 문제를 ‘고액 체납자의 도덕적 해이’로 이해하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대다수 생계형 건보료 체납자들은 소득 자체가 없거나 매우 적어서 보험료를 내기 어렵다”며 “당장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60일의 건강보험증’은 월 보험료 납부금이 5만원 이하인 가구를 대상으로 체납보험료 1회분을 지원하는 캠페인이다. 6개월 이상 건보료를 체납할 경우 건강보험 급여가 제한되지만, 분할 납부 시 일시적으로나마 병원 이용이 가능해진다. 이 경우 최소 60일간 건강보험 혜택을 받는다.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시민단체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생계형 체납자들은 생명과 건강할 권리를 제한당하고 있다”며 “무조건적인 징수를 위한 독촉과 압류가 아닌 건강보험체납자에게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체납보험료 독촉으로 심리적 압박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부당이득금 환수 조치 등 건강보험 체납이 또 다른 채무가 되어 더욱더 빈곤이 악화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재산 가압류, 통장거래 중지, 연대납부 의무 등 과도한 추심행위는 체납자는 물론 자녀들의 경제적 자립마저 어렵게 만든다.

2014년 7월 기준 미납 금액별로 압류세대 수를 살펴보면, 30만원 미만 12만6903세대, 50만원 미만 4만3155세대, 100만원 미만 4만2100세대 등 보험료 미납액이 100만원이 안 되는 21만2158세대가 부동산, 자동차, 예금, 동산 등을 압류당했다.

생계형 체납자에 대한 제도적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해 보이나 정작 건강보험공단은 ‘생계형’에 대한 개념부터 온도 차를 보였다. 공단 관계자는 “(체납자들이) 생계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실태를 파악 중이다. 전부 생계형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같은 5만원 이하라도 4인 가구와 1인 가구는 다르다. 1인 가구인데 5만원 이하라면 생계형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생계형 체납자 실태에 대해서는 “사실 파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전체적이고 외부적인 사항만 보고 판단할 뿐이지 속사정까지 조사할 수 없다”며 “생계형 체납이라고 말은 하지만 딱 부러지게 이 사람은 생계형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고 말을 아꼈다.

추심 과정이 가혹하다는 지적에 대해선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가혹한지 아닌지 개인 사정까지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일률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사업장은 몰라도 지역 세대는 예금 압류를 해놓고 실제로 추심해서 돈이 들어오는 비율이 극히 미미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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