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가족재단 로비에 마련된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쪽지를 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5월 24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가족재단 로비에 마련된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쪽지를 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오는 24일 ‘5·17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 사건이 벌어진 지 꼬박 100일을 맞는다.

20대 여성이 지난 5월 17일 서울 2호선 강남역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한 남성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터진 후 여성들은 이를 ‘가부장제에 만연한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페미사이드)’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과 언론이 강남역 사건을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확연히 달랐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후 거대한 물결이 되어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기획회의』를 통해 발표한 ‘왜 다시 페미니즘인가’라는 글에서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묻지마’는 페미사이드(여성살해)였다”며 “5·17 페미사이드가 여성혐오 사건이냐, 아니냐를 질문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 왜 여성들이 계속되어온 여성살해의 역사 속에서 유독 이 사건에 반응하고 이를 ‘여성혐오’라고 명명했느냐에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손 연구원은 “여성들은 온라인과 대중문화의 장에서 지난 10여 년간 지속된 여성혐오 문화를 자각하고 그에 저항하면서 ‘여성혐오’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해온 가부장제의 차별과 억압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차용해왔다”며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들은 5월 17일의 여성살해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사건임을 각성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5·17 페미사이드’ 사건의 후폭풍은 거셌다. 한 성우가 페미니즘 문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넥슨으로부터 부당하게 축출당하면서 페미니즘 논쟁은 2016년 여름을 강타했다. 온라인 여성주의 그룹 ‘메갈리아’를 둘러싼 젠더전은 폭염만큼 뜨겁게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그리고 그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진보진영의 많은 인사들은 여혐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메갈리아를 공개 지지했다.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저자인 노혜경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메갈리안은 특정할 수 있는 그룹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말문이 대표적으로 터져나온 사건의 이름이다. 귄터 그라스 식으로 ‘아가리를 벌려’ 외치는 모든 사람은 메갈리안일 수밖에 없다”며 메갈리아 지지를 선언했다. 본보에 ‘서민의 페미니즘 혁명’을 연재 중인 서민 교수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메갈리아가 생기자마자 열광했던 사람”이라며 “메갈리아가 세상을 바꿨다”고 단언했다.

서 교수는 “여혐의 만연이 결국 메갈의 탄생을 불러왔다”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이유 없이 가해지는 여혐에 속으로 분을 삭이는 게 고작이었지만, 메갈이 생기고 난 뒤에는 여혐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메갈이 거친 언어로 남성들을 욕하지 않았다면 여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남성들의 폭력을 그대로 미러링하자는 메갈의 전략은 매우 현명했다”고도 했다.

 

지난 5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신촌점 맞은편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한 시민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변지은 기자
지난 5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신촌점 맞은편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한 시민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변지은 기자

손 연구원은 2015년 이후 열광적인 파퓰러 페미니즘 운동이 등장한 것은 생존을 위협당하는 여성들의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진단했다. 손 연구원은 ‘왜 다시 페미니즘인가’라는 글에서 “한국 여성들의 노동조건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경제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정의당 중식이 밴드 사건과 ‘아재정치’라는 수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 시민권 역시 쉽게 부정당한다”며 “그와 동시에 여성혐오 문화는 점점 심해지면서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제도적 차별을 자연화시킨다. 그렇게 여성들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메갈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매한 ‘소녀에겐 왕자가 필요 없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가 1억3000여만원어치나 팔렸다. 이는 메갈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 교수는 “앞으로도 남성들은 메갈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겠지만 이미 늦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목소리를 되찾은 여성들은 더 이상 수동적 존재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2016년 여름, 지금 여기, 한국의 여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 혁명은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메갈리아가 진행한 ‘포스트잇 프로젝트’에선 여성혐오를 비판한 많은 발언이 공개됐다. 맨위 왼쪽은 메갈리아 로고. ⓒ메갈리아 홈페이지
메갈리아가 진행한 ‘포스트잇 프로젝트’에선 여성혐오를 비판한 많은 발언이 공개됐다. 맨위 왼쪽은 메갈리아 로고. ⓒ메갈리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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