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시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야”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성찰...시는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

 

책장을 한참 뒤져 오래된 시집을 찾아냈다. 젊음도 사랑도 버겁기만 했던 스무 살 시절 방황하던 청춘들에게 위안이자 격려가 됐던 낡은 시집, 정호승(64)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시인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참 오랜만에 빛바랜 시집을 넘겨보다 그 시절 가슴을 치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미안하다’ //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1990년대 후반 신문에서 그의 새로운 시집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서점에 달려가 책을 사고는 몇날 며칠을 끼고 다니며 읊어대던 그때의 ‘팬심’을 가득 안고 시인을 만났다. 1950년생, 6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시인은 ‘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옷이 다 젖었다’면서도 단아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시인의 최근 산문집인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해냄·2014)와 함께 옛 시집 몇 권을 시인 앞에 꺼내놨다. 반갑게 시집을 집어 들더니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스페인어로 번역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표현은 이때만 해도 신선했어요.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잖아요. 내가 어떤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존재인가, 타자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타자보다는 나를 먼저 사랑하죠.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 후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유행어처럼 흔히 쓰는 말이 됐고, 비슷한 제목의 드라마도 나왔다. 시인은 “언어가 지니고 있는 신선함에 때가 묻어버렸다”며 “그때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언중(言衆)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도 살기도 합니다.”

 

 

서정은 시의 본질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그 이듬해인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정호승 시인은 ‘이 시대의 서정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서정시인’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이후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 시인의 초기 작품들은 어두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시는 시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70~80년대 우리 시대가 어둠의 시대였고, 청년기였던 저는 그 시대의 어둠에 어떻게 시의 등불을 밝힐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작품들은 시대의 고통과 어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시인은 1990년대 민주화 이후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양상이 달라져 ‘서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서정은 시의 본질”이라는 그에게 “서정이 ‘사랑’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밥솥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밥을 지을 때 밥솥에 쌀과 물을 넣잖아요. 쌀이 삶의 현실이라면 물은 시에 있어서 서정의 역할이에요. 70, 80년대에는 밥솥 안의 물보다 쌀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90년대에는 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변화됐어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변화의 연장선 안에 있었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라는 방법으로 존재를 성찰하게 됐어요. 인간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어하는 그런 시로 바뀌게 됐지요.”

긴 줄글인 소설은 고사하고 작은 화면 속 짧은 몇 마디 말로도 소통하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단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도 곱씹어야 하는 시가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70, 80년대 시대의 어둠을 밝혔던 시가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카페 구석 벽 전기 스위치 위에 올려져 있는 목각 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시 정신이에요.”

“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삶이 피폐해집니다. 시를 이해하면 우리 삶이 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지요. 저기 놓여 있는 장식품을 보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시를 만나는 겁니다. 시를 자꾸 언어로만 생각하는데 일상 속에 시의 정신들이 변종되어서 나타나요.”

 

모든 삶에는 시가 있다

‘시로 인간을 이해한다’는 시인은 시집 말고도 산문집도 여러 권 발간했다. 시인에게 시와 산문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는 이번에는 소나무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솔씨에서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된 소나무는 어느날 폭풍에 쓰려졌어요. 오랜 세월 산 속에 쓰러져 있다가 어떤 사람에 의해 베어져 지게에 실려 어느 집 아궁이에까지 왔어요. 불이 붙기 직전까지 그 소나무에게는 서사가 있기 때문에 소설이에요. 하지만 소나무가 타는 순간의 불꽃과 그 열기로 전해지는 따뜻함은 시라고 할 수 있죠. 인간도 마찬가지로 한편의 시에요. 우리가 죽기 전까지의 삶은 서사를 지니고 있어 산문적 구조지만 죽고 나서는 결국 인간이 남기는 정신과 영혼, 사랑의 세계가 바로 시죠. 우리가 부모님 기일에 부모님이 남기신 돈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듯 말입니다.”

최근에 낸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도 산문집이다. 2년 반 정도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을 묶어 낸 책에는 이 시대를 살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치, 도리 등을 찾고자 한 시인의 고민이 담겨 있다. 특히 시인은 사람들의 ‘관계’에 주목했다.

“산사의 처마 끝에 풍경을 직접 달아본 적이 있어요. 풍경 소리가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풍경은 자기 존재의 가장 아름다움 소리를 바람 때문에 낼 수 있어요. 풍경과 바람의 관계처럼 우리의 삶도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어요. 내가 풍경일 때 내 인생의 바람과 같은 존재를 우리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어요. 우리는 자기 중심적으로 내가 있으니까 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있으니까 존재하고, 부모는 자식이 있으니까 존재하는 것,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결국 타자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성찰해 보고 싶었다는 시인은 전국 곳곳에서 강연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 대학에서는 외면받고 있지만 대학 밖 사회에서는 반대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다양한 사람들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인생의 가치와 비밀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가 대중과 나누는 “인생의 영원한 가치는 사랑”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사랑의 가치는 “적어도 모성을 통과하는 무조건적이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지난해에 돌아가신 94세 아버지가 뼈와 가죽만 남아 스스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분이 64세인 아들에게 ‘조심해서 가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 말씀이 잊히지 않아요. 그게 사랑이죠. 아버지의 사랑이지만 모성이 바탕이 된 부성인 것입니다.”

 

시는 읽는 사람의 것 

테레사 수녀가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고 한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는 시인은 사람들 삶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시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평소 쌓아둔 메모에서 태어난다. 주로 몸과 머리의 상태가 맑은 오전에 글을 쓴다는 시인은 쌓인 메모로 어느 기회에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시를 쓴다.

등단 43년, 중학교 문예반 활동할 때부터 글을 써왔으니 반세기 이상 시를 써 온 시인은 그러나 “아직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60대 중반의 그의 나이는 “인생의 시간에서 공부하고 생각할 시기이지 나를 드러내야 할 시기가 아니”라며 자신이 낸 책들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내는 과정물, 숙제, 리포트”라고 했다. ‘공부하는’ 시인은 시를 통해 “내 삶을 인간으로서 바람직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사람들이 시를 읽을 때 자신이 쓴 시라고 생각하고 읽었으면 좋겠어요.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고 그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시 속에 자신의 삶이 다 있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시인입니다. 내가 밥을 먹기 위해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다른 일로 바빠서 시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내가 시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통해 인생의 다양함과 깊이를 이해하고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는 인생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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