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부리는 쿠바 여성들, 나이 불문 지지 않는 꽃
“우린 얼마나 많은 시간 여자임을 느끼고 있나”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주류를 이루는 까사 발레아르떼. 이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오랜 사랑을 확인한다. 서로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며. ⓒ여성신문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주류를 이루는 까사 발레아르떼. 이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오랜 사랑을 확인한다. 서로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며. ⓒ여성신문

덥다. 정신 몽롱하게 덥다. 서울에서 소포가 도착했다는 우편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온 DHL 특송 사무실, 낡은 선풍기 한 대만이 간신히 돌아가고 모두가 더위에 마비된 듯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몇 되지 않는 직원들은 더위에 영혼을 뺏겨버린 듯 기다리는 손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 손질을 하거나 개인적인 통화를 길게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관심하게 서류철을 뒤적일 뿐.

마침내 인내심에 한계가 왔을 때, 사무실 여직원들의 눈빛이 일제히 빛난다. 의자 깊숙이 축 늘어져 있던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머리를 매만지며 여성미를 뽐내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시선이 꽂힌 곳에는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고 건강한 청년이 밝게 또는 섹시하게 미소 짓고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한 여직원들의 유혹을 한몸에 받으며 등장한 청년 또한 그녀들의 시선을 한껏 즐기며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아낌없다.

‘어헛!’ 기다림에 지쳐 잔뜩 심술이 난 내 마음은 소리쳤다. ‘이봐요~ 내 물건 찾아줄 때도 그 눈빛 그대로 빛나길 바라겠어요.’ 그녀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리 없는 항의를 해보지만 나의 시선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그리고 청년이 떠나자 싱그럽게 빛나던 여자들의 눈빛은 생기를 잃고 무기력을 되찾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잔뜩 뿔 나 있던 내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쩌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도 감정 감추기에 급급한 나와는 다르게 마음껏 표현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는 언제부터 감정을 감추는 데 에너지를 써 왔을까. 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표현하기에 앞서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내가 인지한 상대의 감정을 판단하느라 갈팡질팡할 뿐. 

바람기 잘 날 없는 그녀들 아이~ 칸델라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데 꺼리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서로를 과감하게 유혹하는 장면은 거리에도 시장에도 관공서나 교실에서도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그 순간을 즐기는 데 시간도 장소도 나이도 제약 받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거리에는 휘파람 소리, 은근한 눈빛과 사랑의 속삭임이 가득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한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뚱뚱해도 말랐어도,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한결같다.

 

거리거리마다 가득한 연인들. 조금은 도발적이기도 한 이들의 자태에는 자신만의 매력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만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여성신문
거리거리마다 가득한 연인들. 조금은 도발적이기도 한 이들의 자태에는 자신만의 매력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만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여성신문

거리를 걸을 때 휘파람 소리 들려오면 우울했던 마음도 활짝 핀다는 쿠바나, 그녀들의 걸음걸이는 특히 인상적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엉덩이를 살랑대며 최대한 여성성을 뽐내며 걷는 그녀들 모두 마치 ‘나 좀 보세요, 얼마나 매력적인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여성성은 춤을 출 때 극대화된다. 때로 내 눈엔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할 때도 많지만 자신의 매력을 알고 뽐내는 데 주저함 없는 그 자신감이 부럽기만 하다. 그런 그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내가 여자임을 느끼고 자각해왔을까’ 궁금해진다. 막 여성성이 꽃피웠을 무렵엔 진로 고민에 지쳐 있었을 테고 얼굴에 주름 지듯 몸도 주름 지기 시작한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아쉬워하는 시간이 더 많았을 테고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물론, 여성성을 뽐내는 것을 즐기고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함 없으며 호감 가는 남자를 유혹하는 데도 적극적인 그녀들의 바람기는 악명(?) 높다. 바람기 많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일명, 칸델라(Candela). 우리말로 바람둥이에 해당한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쿠바 남자 또한 바람기 많기로 세계 제일이라는데 거기에 버금가는 것이 쿠바 여자란다. 그래서 최근 쿠바의 젊은 연인들은 24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감시하는 연애가 유행이다. 잠시의 틈만 있어도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는 자신들의 바람기를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조금 고전적이지만 누군가를 만나기까지 오래 생각하고 충분히 그리워한 뒤 깊은 관계를 맺는 ‘러브스토리’를 꿈꾸는 쿠바인도 많다. 최근 쿠바에 불고 있는 한국 드라마 열풍의 이유 중 하나다.

 

쿠바에서 살사를 출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신문
쿠바에서 살사를 출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신문

춤과 음악을 즐기는 데 세대차란 없는 쿠바인들에게 연애 또한 세대차란 없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낄 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혹은 이제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란 이유는 핑계조차 되지 않는다. 사십대 초반,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할 무렵 만난 이들의 연애문화는 때론 주책이 이만저만 아니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어쩌면 내겐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매주 일요일 오후, 아바나 중심가에 자리한 ‘카사 발레아르테(Casa Balearte)’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주류를 이루는 이곳에는 하얗게 센 머리, 이미 무너진 몸매와 주름진 얼굴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더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의 젊고 건강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70대 커플, 이제 막 시작하는 60대 커플, 평생 사랑해왔을 80대 커플, 걸을 때 지팡이가 필요해도 춤 출 때만은 화사하게 꽃피우는 젊음으로 서로를 유혹하는 이들이 내게 말해주는 것을 느낀다. ‘넌 아직 아름답다고, 절대 늦지 않았다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라고.’

나도 그녀들처럼 오늘은 고개를 살짝 15도 각도로 높게, 가슴은 쭉 펴고, 허리는 반듯하게,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본다. 조금 쑥스럽지만 기분이 좋은 변화가 내 안에서 꿈틀댄다. 그리고 느낀다. 나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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