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도갤러리 전속작가 박인숙 화백

 

지난 2월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를 찾은 박인숙 화백(왼쪽)과 지인.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dosage for cialis sexual dysfunction diabetes cialis prescription dosage
지난 2월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를 찾은 박인숙 화백(왼쪽)과 지인.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dosage for cialis sexual dysfunction diabetes cialis prescription dosage
ⓒ여성신문

올해는 박수근(1914.2.21~1965.5.6)이 사망한지 49년 되는 해이다.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지난 3일 시작했다. 서울, 부산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전에 이은 릴레이 전시다. 1월부터 전시는 연일 성황이었다. 한국 미술사에서 박수근의 위치가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현재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화가다. 국내 최고 기록은 그의 작품 ‘빨래터’로 경매가 45억2천만원에 이른다. 해외 초대전이 열릴 정도로 외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화가로, 2년 전에는 위작 논란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살아 생전 박수근은 여염집 아낙, 나무, 시장 등 일상의 소재를 투박한 질감과 담백한 색으로 그리던 가난한 화가였다. 가난의 질곡은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벗어지지 않았고, 그는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딸 박인숙(71)씨도 화가의 길을 걸었다. 딸이 지켜본 아버지 박수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음은 박인숙 화백과의 일문일답

-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는 소감은.

“환갑, 칠순처럼 백순 잔치를 해드리는 기분이에요. 사람들이 작품을 구석구석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이번 전시를 위해 소장 작품이 아닌데 빌려온 작품도 많습니다. 서울에서도 하고 양구에서도 하고 지방에서도 하고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전시도 하니 자랑스럽고 흐믓하지만 한 켠으로 아버지가 고생만하다가 돌아가셔서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한국전쟁 이후 박수근 화백은 남으로 내려와 서울 창천동 한 칸 짜리 집에서 온 식구가 살았다. 당시 그는 피엑스(Post Exchange, 군인 마트)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했지만 일이 작품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림이 팔려야만 돈이 나오는 생활. 그의 딸은 어린 시절을 “소금물에다가 밀가루만 뜯어 넣은 음식을 먹고 살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루에 세 마디 할 정도로 과묵한 분이었어요. 키가 크고 외국사람 비슷하게 건장한 체격인데, 성격은 덩치랑 안 어울리게 온화하고 자상하고 상대방을 굉장히 편하게 해주는 분이었죠. 하루는 ‘인숙아, 붓 좀 빨아오너라’ 하셔서 빨래비누에다 손으로 붓을 빨았는데 제대로 못 빨고 가져오니까 ‘속까지 빠는 거다’ 이렇게 얘기해주세요. 그런데 얘기해줘도 잘 못 빨아오니 ‘그래, 됐다. 수고했다’ 하고는 아무런 책도 하지 않으시고 손수 나와서 붓을 빠셨죠.”

박수근 화백의 일상은 한결 같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점심을 먹고 4시까지 또 그림을 그렸다. 집안일을 잠시 돕고는 반도화랑으로 외출을 했다가 저녁이면 돌아왔다.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 빨래터gabapentin generic for what http://lensbyluca.com/generic/for/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 '빨래터'
gabapentin generic for what http://lensbyluca.com/generic/for/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

- 화가로서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스케치북이 들려있었어요. 뭘 보면 무심코 지나가질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서민의 화가에요. 시골의 흙을 맡아보는 듯한 재질감으로 그림을 그리셔서 고향의 흙냄새가 풍기고, 아버지의 노인이나 여인 등 약자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작품세계 안에 살아 숨 쉬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독창적인 세계를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버지는 우리나라에 맞는 토속적인 재질감과 색감과 소재를 표현해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으뜸이고 스스로 재조명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수근이 토속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한국 미술계의 주류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해외파들이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친일미술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소재와 구조라면 몇 번이고 그리시곤 했어요. 어떨 땐 수년이 지난 후에 똑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하셨구요. 후일 그런 작품들이 위작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세간에서 동생(박성남 화백)이 아버지 그림을 똑같이 그려서 팔아서 생활을 했다고 오해를 했었는데 그건 아닙니다. 혼자서 그림을 독학을 해야 하니까 아버지 그림을 보고 공부한다고 그린 작품이 한두 점 있었던 거죠. 동생의 그림에는 동생 사인이 들어있어요.”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56, 1962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56, 1962
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는 유독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가다가 길거리에서 본 것들을 주로 스케치하셨어요. 당시에는 남자들은 일하러 나가고 길거리에는 많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그림에 여자,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에요. 또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 애정이 가는 것들을 많이 그리셨는데 특히 약한 사람들에게 눈이 많이 가신 것 같아요.”

박수근의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죽기전까지 10여년에 그린 작품이 주를 이룬다. 박수근 화백이 남긴 작품은 300-400여점이며, 이중 55%(인물화 중에는 80%)가 당시 아낙네, 촌부 등으로 불리던 여인들이다(‘우리들의 화가 박수근’시공사,1995). 한국전쟁 전후기는 전쟁 탓에 일할 수 없게 된 남자들이 많아져 여자들이 생계형 사회 진출을 해야만 했던 ‘1세대 워킹맘’시기다. 박수근의 그림 속 여인들은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고는 머리에 짐을 이고 가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절구를 찧고 빨래를 한다. 이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 교감하기보다 따로 행위 하는 분리된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여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고된 일을 하면서도 고통을 내비치지 않는 묵묵한 모습으로 표현됐다. 평론가 윤범모씨는 이를 두고 박수근 화백이 ‘인고의 여인상’을 주로 그렸다고 표현했다.

-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1970)이 박수근을 모델로 한 이야기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쓸쓸하고 춥고 한 걸 아버지한테 비유한 것 같아요. 아무 희망도 없이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수 있다, 꿋꿋이 버틴 다음에 좀 화려한 옷을 입자’ 하는 희망의 표상이 ‘나목’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박완서 작가를 아버지 살아생전에 본 적은 없고 나중에 인터뷰를 같이한 적이 있는데 얼굴이 작고 소박하고 훌륭하신 분이라고 느꼈어요. 아버지하고 박완서씨는 깊이 있는 인간성에 반해서 정신적인 교류가 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 에너지를 주신 분들인 것 같아요. 돌아가신 뒤, 빈소에 갔는데 온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말고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해서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 딸 박인숙과 아들 박성남, 손자 천은규 화백까지 3대가 화가다. 화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상형을 보면 떨리고 흥분되고 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작품을 볼 때 그런 떨림이 있어요. 저는 하루라도 그림을 안 그리면 가슴이 대포알이 뻥 뚫린 거 같은 마음이 듭니다. 예술에는 숨을 쉬는 작품과 숨을 쉬지 않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해요. 볼수록 싫증을 느끼는 작품이 있고 볼수록 빠져드는 작품이 있거든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좋은 그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볼 때마다 계속 다르게 느껴지는 작품은 작가가 거기에 인생과 영혼을 부어넣었을 때 나온다고 믿습니다.”

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bystolic coupon 2013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