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말을 한다. 힘내!’ 몇 년 전 광화문광장 앞에 걸린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글귀를 보고 난생처음 느꼈던 감정이다. 시 자체가 걸작이기도 했지만 삐뚤빼뚤. 줄 간격을 무시하며 누군가 손으로 쓴 듯한 글씨는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인간미가 넘친달까. 당시 많은 네티즌 역시 “힐링을 받았다”며 사진을 찍어 인터넷상에 올렸다. 그때 그 글씨가 손으로 직접 쓰는 글씨 디자인인 ‘캘리그래피(callgraphy)’라는 걸 알게 됐고, 한번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글씨를 쓸 수 있을까?
글씨에 감성을 담다…캘리그래피에 도전
화선지 한 장에 써내려가는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벚꽃 엔딩’ ‘봄꽃’ 순식간에 종이 한 장에 봄이 가득 담겼다.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이 탄생했다. 글씨를 쓴 하랑방캘리그라피(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진경(32) 대표가 웃으며 말한다.
“예쁘죠? 캘리그래피에는 이렇게 감성이 묻어 나와요. 제가 캘리그래피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죠. 가령 ‘사랑’이라는 똑같은 글자라도 연인과 이별을 앞둔 슬픈 감정과 갓 사랑에 빠져 심장이 콩닥거리는 감정을 달리 표현할 수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예를 시작했다는 김 대표는 서예학을 전공했다. 이후 일반 회사에서 일을 하다 5년 전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캘리그래피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디자인 감각도 살리고 현대 매체와 접목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김 대표에게 캘리그래피는 제격이었다. 퇴근 후에는 집에 와서 글씨 연습에 매진했다. 개인 작업실과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 전 그 꿈은 현실화됐다. 지금 김 대표는 한국캘리그라피 디자인협회 전문위원을 비롯, 전시와 특강 등을 하고 있다. 하랑방의 하랑은 김 대표의 호로 함께 사는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을 지닌다.
“캘리그래피를 배우신 분들이 본인이 쓴 글씨를 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붓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원데이 클래스로 한번 체험해보고, 적성에 맞으시면 제대로 배워보시라 권하고 싶어요. 기본적으로 8주 정도 배우면 문장은 어느 정도 쓸 수 있답니다.”
김 대표는 본격적으로 캘리그래피를 쓰기 전 이론을 설명했다. PPT 화면에는 서예의 다양한 서체가 담겨 있었다. “캘리그래피는 서예를 바탕으로 시작됐어요.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글꼴을 변형해서 다른 예술 품목과 접목한 거죠. 서양은 보통 펜으로, 동양은 붓을 사용하는데 붓은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 좀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요. 단어 뜻의 시각적인 전달이 잘 되죠. 아무래도 서예를 배우면 붓을 다루는 법을 알기 때문에 기본기를 익히는 데 좋아요.”
술, 라면부터 드라마와 영화 포스터, 청첩장에 이르기까지 캘리그래피를 활용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았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포스터를 보세요. 다른 글씨는 작아도 김수현를 뜻하는 ‘해’와 한가인을 뜻하는 ‘달’의 글씨 크기는 크죠? 캘리그래피는 글씨 크기를 크게 하거나 작게 해서 강조하곤 해요.”
이론 수업이 끝난 후 실전에 들어갔다. 문방사우(종이, 붓, 먹, 벼루) 앞에서 멍하니 화선지를 쳐다봤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이후 처음이라 긴장됐다.
“크기, 굵기, 포인트, 이 세 가지를 기억하세요. 글씨 크기를 달리하고, 붓에 힘을 줘 눌러서 굵게 표현하거나 힘을 빼서 얇게 표현해보세요. 쓰기 전 내가 어떻게 표현할 지 이 세 가지를 계산해야 해요.” 김 대표는 가로획을 길게 하거나 세로획을 길게 쓰면서 시범을 보여줬다.
기자가 쓰기로 한 단어는 ‘꽃봄’. 꽃 피는 봄이 온 만큼 글씨로 봄을 표현하고 싶었다. 여성스러운 느낌이 가미되려면 곡선이 많을수록 좋다는 김 대표의 설명에 따라 붓을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화선지에 끄적거리다가 꽃의 ‘ㅗ’를 길게 그려봤다. ‘ㅗ’가 마치 ‘꽃 줄기’가 된 듯했다. ‘ㄲ’의 ‘ㄱ’은 부드럽게 붓을 터치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 같다”는 김 대표의 말에 점점 자신이 생겼다. ‘꽃’은 포인트로 주고 싶어 크게 썼다. 두 단어 모두에 포인트를 주면 안 되니 ‘봄’은 작게. 대신 봄은 가로획을 길게. 책상 위에 화선지 6장이 쌓였다. 마지막으로 종이 패널에 ‘꽃봄’을 적었다. ‘봄’ 위에 비는 공간은 심심하니 분홍색과 연두색 물감을 묻혀 손으로 톡톡 쳤다. 완성된 단어에 스스로 감동했다.
나만의 캘리그래피 작품 만들기는 나름 성공이었다. 어느 소설가가 ‘철수를 사랑하니 온통 거리의 사람들이 다 철수로 보이더라’는 말이 떠오른다.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나니 사방팔방 간판에 적힌 캘리그래피가 눈에 들어온다. 손글씨가 희귀해진 요즘,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나오는 캘리그래피를 배워보는 건 어떨까.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싶다면
하랑방의 캘리그래피 원데이 클래스 가격은 3만원. 캘리그래피 교육 및 세미나 일정 등 자세한 정보는 한국캘리그라피 디자인협회 홈페이지(www.kcdia.org)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