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전성기는 몇 살이었나요?

벌써 12월 중순. 달력에 얼마 남지 않은 빈칸에 송년회 약속을 체크하고, 모여서는 나이 타령을 하고 헤어지는, 해마다 반복되는 일을 또 하게 되는 때가 됐다. 미혼 여성은 해를 넘기면서 “네 나이가 몇인데”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한 번 더 들어야 하고, 마흔을 넘기면서는 “만으로는 30대” 하고 우기는 일을 일 년쯤 계속하고서야 자신의 나이를 인정한다.

나이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것은 남녀 모두에 해당하겠지만, 여성의 나이 스트레스가 큰 것은 확실히 남성 중심적 문화의 소산이다. 남성들에게는, 입지(立志)니 불혹(不惑)이니 이순(耳順)이니 하는 전통적인 담론들은 물론이거니와, ‘남자 나이 마흔이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처럼 흔히 쓰는 말에서조차, 나이를 먹는 것이 곧 성숙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에 비해 여성의 경우 어리고 예쁜 나이, 혹은 결혼 적령기라 치부되는 나이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말들이 지배적이다. 아마 지금 50대 이상이면, 여자 나이 22세면 금이고, 23세면 은이고, 24세면 동이고, 25세 넘으면 큰일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대중가요사를 훑어보면, 여자의 나이에 대한 생활감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까지의 노래에서는 여자의 ‘한창 나이’를 10대 후반으로 치고 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아리켜 줄까요 열일곱 살이에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별빛도 수줍은 버드나무 아래로/ 가만히 오세요

박단마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1절(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1938)

이 노래에서는 17세를 확실히 연애를 할 만한 나이로 노래하고 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한창 공부해야 할 고2지만, 당시에는 결혼하고도 남을 나이였다. 춘향이 몽룡과 사실혼 관계를 가졌던 나이가 ‘이팔청춘’이니 16세였고, 이런 적령기에 대한 생각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1906년생 내 할머니는 18세에 결혼을 했는데, 집안에서 ‘저런 다 늙은 계집애를 어떡하면 좋으냐’는 걱정을 늘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조혼한 아내가 금방 죽어 19살인데도 홀아비가 된 우리 할아버지에게 재취로 시집을 왔다.

가수 박단마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를 부를 당시 그의 나이는 만17세였다. 이 나이는 특별히 어린 것도 아니었다. ‘목포의 눈물’이 히트할 당시 이난영의 나이는 19세였고, ‘눈물의 여왕’이란 칭호를 들었던 여배우 전옥(최민수의 외할머니)의 데뷔 나이도 16세였다. 특별히 어린 나이가 아닌, 여자 연예인 데뷔의 적정 나이였던 셈이다. 당시 기생들의 나이도 대개 10대 후반이었고, ‘기생 나이 스물이면 환갑’이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10대 후반을 여자의 전성기로 생각하는 생활감각은 광복 후 백난아의 ‘낭랑 십팔세’(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1949),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1960)에까지 계속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들은,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 ‘소쩍새 울’ 때 오겠다던 남자를 기다리고, ‘보기만 하여도 울렁’거리는 ‘수줍은 열아홉 살 움트는’ 사랑의 적령기 여자로 형상화된다.

당시라고 여자가 서른에 죽는 것도 아니었을 터인데, 여자 나이는 늘 10대 후반을 전성기로 생각했다. 그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보내버린 여자들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면 끔찍해진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신일선의 나이는 14세였다. 신일선은 18세에 오빠의 강압에 의해 어느 부자의 재취로 결혼을 했는데, 아이 낳고 살다 보니 본부인이 멀쩡히 살아 있는 사기 결혼이었다. 결혼 생활은 파탄 났고, 배우로 컴백했으나 2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물간 늙은 여배우 취급 받다가 은퇴했다. 그는 기생과 시골 구멍가게 주인 등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며 매우 불우하고 긴 말년을 보냈고, 1990년에 타계했다. 14세에 인생의 절정을 맛보고, 이후 팔십이 넘도록 계속 내리막뿐이었다.

그러니 경기고녀와 일본 도쿄관립음악학교를 나온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1926년 나이 서른에 ‘사(死)의 찬미’를 부르고나서 현해탄에 투신 자살한 것은, 당시로선 결코 ‘요절’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삶을 살았던 옛 여자들을 생각해서라도 나이에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건 세상의 편견에 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