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나이에도 크고 작은 무대에서 열창…
지난해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받기도
“연예인은 센스와 광기로 살아… 관객 환호성을
청심환 삼아 필사적으로, 결사적으로 노래 부른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 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홍콩아가씨’ 중 일부·이재호 작곡)로 6·25 직후 삭막하고 황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설렘을 안겨주었던 금사향(본명 최영필·86)씨를 만났다. 그는 이 ‘홍콩아가씨’ 한 곡의 대히트로 ‘아가씨’ 노래의 원조가 됐고, 아직도 무대에 서고 있는 최고령 원로 가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노래는 2000년대 중반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돼 신세대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연히 나간 가수경연선발대회서
1등 거머쥐며 화려한 데뷔
지난 16일 그가 생활하고 있는 일산의 한 요양센터에서 만난 그는 대뜸 “‘진달래’란 이 방 이름이 예쁘지 않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거든”이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방 벽엔 그를 방문했던 초·중·고생들의 “할머니, 정말정말 아름다우세요!”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쓴 편지와 함께 할리우드 스타 메릴린 먼로와 한류 스타 장근석의 사진이 “보기 좋다”는 공통 이유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는 연신 걸려오는 공연 섭외 전화로 바빴다. 지금으로선 좀 상상이 안 가지만, 1950~60년대 인기가 절정이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겐 매니저가 없다. 작은 비닐봉투에 한가득한 메모지에 빼곡하게 굵은 글씨로 적어놓은 메모를 뒤적이며 일정을 확인하곤 한다. 얼마 전에도 경남 사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진 추억의 가요무대에 섰고, 14일엔 곧 방영될 KBS ‘가요무대’를 위해 녹화했다. “노래하다 흥에 못 이겨 쓰러지면 저 여자 시체 다 됐다고 흉 볼까봐 안전 빵으로”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렀지만.
“한창때는 스타라 (대기실 분장실도) 독방을 썼고, 여기 들어와선 죽을 때까지 이 독방을 써. 그런데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한창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웃음) 워낙 고음이라 드러누워서도 다 소리를 낼 수 있어. 밥은 사흘이면 쉬는데, 난 지금 그 밥에 곰팡이가 낀 격이어서 얼굴이 묵은지에 양념한 것 같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은 헌 구두에 구두약 칠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내 팬들이 재미있다고 막 웃어. 젊었을 때는 입에 지퍼 채운 듯 말을 못 했지만 나이 들어 무대 서니 말이 막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해.(웃음)”
사실 그는 말년 막바지에 생활고로 고생했다. 경기 고양시 동산동 공기 좋고 한적한 곳에 연예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고, 이를 위해 아껴왔던 종잣돈을 믿고 있던 지인에게 사기당한 후 인근 가건물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생활해왔다. 온몸 아프지 않은 데가 없어 ‘인조인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그는 심각한 퇴행성 관절염으로 바깥 출입이 힘든 때도 있었지만 가수 남일해 등의 도움으로 웰튼병원에서 무료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 제2의 무대인생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돈은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연락선 같은 것, 돈 한 푼 없어도 내 마음속에 희망이 있으면 그게 천당이고, 절망이 가득 차면 그게 지옥 아니겠어? 똑같은 분위기에서도 생각만 바꾸면 천당이 되는 거야”라며 요즘도 기분 내키면 혼자 버스에 올라 창밖 풍경을 보다가 내려서 카페에 들어가 젊은이들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곤 한다고 했다. 이런 초긍정 낙관주의가 통했는지 2010년 한 해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과 특별공로상을 연거푸 수상한 데다가 지난해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몇 년 전 팔순잔치를 강화도 선원사에서 내 히트곡 ‘임 계신 전선’(작곡 박시춘) 노래비를 세우며 했어. 그때 주지승이 나를 평생 모시겠다고 했는데, 단번에 싫다고 했어. 이래 봬도 내 코가 육쪽마늘 코야. 평생 단 돈 천 원도 안 꿔 썼어. 돈이 없으면 시금치죽 쒀 먹으면 되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거나 도움 받을 일이 뭐 있어? 속상하면 속상한 맛으로 사는 게 인생 아니겠어?”
“‘임 계신 전선’ ‘홍콩아가씨’ 등 전후 어려운 시절 희망과 낭만 선사한 게 보람”
“어떻게 보면 요새 가수는 당일치기로 되는 것 같아. 그때는 ‘다홍 염낭 남염낭’ 등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을 즉석에서 몇 번 해보는 것도 오디션 과정에 포함됐었어. 난 레코드사가 선발한 가수라 연습생 등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수가 됐고, 비록 데뷔곡 ‘첫사랑’은 전쟁통에 별 히트를 하지 못했지만 그 후 연속으로 ‘임 계신 전선’ ‘홍콩아가씨’가 크게 인기를 얻어 아직까지도 주로 그 두 곡으로 먹고 살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홍콩아가씨’는 전후 배고프고 비참하고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아련한 희망을 안겨준 노래 같아. 노래 속 자유로운 분위기 자체가 희망이 된 것 같고, 이게 사교춤으로도 이어졌지.”
사실 그는 무대의상에 새 기운을 불어넣은 선구자 격이다. “하늘 같았던” 선배 신카나리아(1912~2006)가 무대의상은 인조견 한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충고했지만 “팬들이 먼 데서만 나를 보란 법이 있느냐”며 “최고급 양단, 뉴똥(명주실로 짠 옷감)으로 한복 의상을 만들 것”이라고 대꾸할 정도로 옷에 대해서만은 소신이 강했다. 당시 가수들 세계에선 “하루 선배가 대령, 하루 후배가 신병”이라며 아무리 좋은 음식과 과일이 들어와도 선배가 먼저 손을 대지 않으면 절대 손을 안 댈 정도로 위계질서가 엄격한 때였다.
“군대 위문공연 때인가 한복에 8㎝ 뾰족구두를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어. 작은 키 탓도 있었지만 한복 입으면 꼭 고무신만 신고 노래 부르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어. 갓난아기들의 돌 버선 앞코에 수놓은 매화꽃에서 힌트를 얻어 무대의상에 수를 넣는 것도 처음 시도했지. 치마폭에 큼지막하게 공작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것을 수놓아 시선도 끌었지. 지금은 스팡클(반짝이)이 흔하지만 당시엔 귀해서 브로치를 한 서른 개 정도 사서 옷 곳곳에 무늬처럼 달아 스팡클 효과를 내기도 했고, 철공소에서 구리줄을 사서 그걸 ‘에스(S)’자로 만들어 머리에 딱 핀처럼 꽂아 멋을 내기도 했어. 요즘 가수들로선 상상도 못할 얘기지? 우리 전에 대선배들의 경우엔 솥 밑에 낀 검정 그을음을 손톱으로 긁어내 이것을 돼지 비계와 섞어 눈썹 그리는 연필로 사용했다고 하니, 거기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
하여튼 새까만 벨벳으로 만든 의상과 흑장미 꽃을 달고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니 조그만 서양 인형처럼 보여 넋이 빠져 풀썩 주저앉는 관객도 있었다고 해.(웃음)”
8㎝ 하이힐, 구리줄 헤어핀 등 무대의상 개척
“겹치기 출연 욕심 안 부린 게 장수 비결”
생계를 위해 국제시장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1927~89)이 전기용품을 팔고, ‘애수의 소야곡’의 가수 남인수(1918~62) 부부가 샌드위치를 팔던 부산 피란 시절을 거쳐 그는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무대에 끊임없이 서고 있다. 본명은 ‘최영필’이지만 예명 ‘금사향’에 담긴 “거문고 실이 울리는 소리”란 뜻이 가진 섬세하면서도 길디긴 잠재적 역량 때문일까.
“평생 가수로 살면서 특별한 관리는 안 했어. 있다면 지나친 욕심 안 부리는 것 정도랄까. 그래서 평생 겹치기 출연 같은 것은 안 하려고 했어. 한창 전성기 때는 남자 가수, 여자 가수들이 다 나를 시기해 남녀를 불문한 공동 라이벌들의 견제 속에 살았지만 그런 라이벌들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기쁘게 생각해서 싸움 한 번 안 했던 것 같아. 슬럼프? 숨이 붙어 있는 한 고통·비통·애통 없이 어찌 산다고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맨날 명절이고 생일이야.(웃음)”
그는 말끝에 연예인은 “센스와 광기로 사는 것”이라며 &l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