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조카가 할머니한테, 즉 우리 어머님한테 ‘돌아가셨다’는 말의 뜻을 물었을 때 어머님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할머니도 언젠가는 죽는다고 설명했더니 조카는 대성통곡했다. 어머님이 놀라서 “지금 말고 동준이가 커서 고등학생이 됐을 때 그때 죽을 거야” 하고 달랬지만 조카는 더욱 큰 소리로 울면서 “나는 안 클거야, 도로 작아질거야” 하고 울었다.

성당의 노인대학을 다니시던 인연으로 어머님은 노년에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명은 ‘엘리자베스’였다. 그런데도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불교의 신심 때문인지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절에 가고 성당에도 가는 것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다.

나는 등산하다 절을 만나면 어머님을 위해 대웅전에 들어가 절을 올리곤 했다. 절에 다녀온 얘기를 하면 어머님이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 우리 어머님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고 왔어요” 하고 말씀드리는 것을 나 역시 좋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머님이 말씀을 바꾸셨다. “이제부터는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지 말고 편안히 돌아가시게 해달라고 빌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걸 영 받아들이질 못해 계속 오래 살게 해달라고 절을 올렸다.

꼬마 조카가 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됐을 때 어머님이 팔십이 넘어 앓아 누우셨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병원에서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기도를 바꾸었다.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매달려 오로지 “편안히 가시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가시는 길이 고통스러울까 오로지 그것만이 두려웠다. 변변찮은 나의 기도가 통했을리가 있을까만 아무튼 어머님은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언니들은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조차도 자식들 마음 상할까 엄살도 안 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마주하신 거라고 이야기했다.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남긴 시에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시가 있어 대문호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어디선가 읽은 글에, 김수환 추기경도 살아계실 적에 어머님을 그리워해 “어머님을 5분간만이라도 다시 만나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하셨다던가. 큰 어른들이 이러실진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형제들이 있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어머님에 대한 추억을 함께 이야기하고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차례로 형제들을 여의게 될 때 그 슬픔은 또 어떻게 견뎌내랴 걱정이 닥쳤다. 형제들뿐이랴, 아끼는 벗들을 차례로 잃게 될 때의 슬픔은 또 어찌 감당하리. 아아, 죽음 앞에선 누구나 ‘을’인 것을.

때마침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이야기하고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죽음이란 삶의 연장으로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라면, 존엄한 삶은 존엄한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리라. 차제에 죽음을 대하는 문화, 나아가 ‘임종문화’에 대해서도 다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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