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이 로마성보다 로맨틱” 고향 사랑한 페미니스트 나혜석

나혜석이라는 이름에는 부정과 찬탄, 당당함과 슬픔이 숙연함으로 묻어난다. 오랫동안 이 땅을 지탱해온 가부장적 완고함에 저항하다 깊은 상처를 입은 한 개인의 자유를 향한 고단한 분투, 그것이 나혜석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한동안 부정한 여자의 대명사로 널리 회자됐고, 이러한 평가에 따라 예술가적 삶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전업작가의 길을 걸으며 3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던 그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비운도 있지만 철저하게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광수와 염상섭보다도 앞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탁월한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던 나혜석에게 영광스러운 작가적 칭호도 찾을 길이 없다.

화령전 담장 옆에 서 있는 생가 표지석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지날 수 있는 곳에 세운 것이다. 그곳에서 30m쯤 안쪽에 나혜석 생가 터가 있다. 나혜석이 1896년 태어날 당시 주소는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 신풍동 51번지 일대)였다. 대지 1791.9㎡에 달하는 넓은 한옥은 현재 다세대주택과 무용학원 등이 들어서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가 터를 뚫고 난 길 한쪽 가건물 벽에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나혜석 생가 터에서 50m 지점에 삼일여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혜석이 동생 지석과 함께 공부했던 초가집으로 된 학교였다. 종로교회 매일학교에서 시작된 수원 최초의 여학교로 나혜석의 날갯짓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공식적으로 삼일여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 사립여자미술학교로 점차 자신의 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물상이 들어선 그곳에서 북쪽 성벽을 따라 가면 서울 이남에서 가장 큰 문인 장안문을 만난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을 만날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1원짜리 지폐의 표지모델로 조선 건축물의 자랑이었던 화홍문이다. 나혜석에게는 또 다른 창작의 산실이었다. 1916년 첫사랑 소월 최승구가 고흥에서 죽고 난 뒤 이곳 화홍문에 올라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며 ‘내물’이라는 시를 지어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나혜석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수원과 화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파인 김동환에게 보낸 엽서에 고향 수원은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릴 만한 곳이라 자랑하고 있다. 유럽 여행 이후 로마성과 비교하면서 화성이 보다 로맨틱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나혜석이 유럽과 미국을 거친 구미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짐에는 많은 그림 작품과 세계적 명화의 리프린트본이 들어 있었다. 첫 미술전시회를 서울에서 연 이후 두 번째 미술전람회가 고향 수원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1929년 9월 23~24일 수원포교당에서 전시가 이뤄졌다. 유럽에서 가져온 명화 그림들과 나혜석의 작품 전시였다. 미술이 무엇이고 유화가 무엇인지도 모를 당시 수원의 첫 미술전람회는 동아일보 수원지국 주최로 이뤄져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향 수원에서 전람회를 개최하고 싶었던 나혜석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요청에 따른 전시였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돼 있고 지난해에는 나혜석학회가 결성돼 학회지 ‘나혜석연구’ 창간호가 발간됐다. 더욱 소중한 것은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는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가 올해로 5회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수원에서 나혜석은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