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성들은 역사에 남지 못했나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는 여성은 몇 명이나 있을까. 선덕여왕, 신사임당, 명성황후 등 20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왜 수많은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갔는데도 그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녀들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간의 삶을 기록한 것인데, 기록이 없는 대상을 역사가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에 대한 기록은 이다지도 적은가. 기록은 문자로 이뤄지는데, 전근대사회에서 문자란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지배층은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것으로 피지배층과 구분됐다. 신분은 지배층이었다 하더라도, 그 시대 여성들이 문자를 마음대로 활용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여성 유학자들이 나왔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숨어서 몰래 써야 했다. 근대 이후에 여성들의 삶은 더 많이 기억된다. 여성들이 스스로 기록한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역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의,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하는 사람이 문자를 통해 자신의 경험 가운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기록한다. 똑같이 24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고 해서 그날의 일기를 똑같이 쓰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그날의 중요한 사건은 다르다. 그러니까 지배층 남성의 기준에서 가치 있는 것만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그들에게 국왕의 활동이나 양반의 삶만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지, 집안에서 살림하는 여성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들 자신도 표현할 수단이 없었기에 그녀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바로 한글 창제의 위대함이란 여성들에게 문자 수단을 준 것이었다. 남성 지식인들이 외면했던 훈민정음을 익히고 쓰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준 것은 바로 여성들이다. 당시 한글을 낮춰 부른 또 다른 이름은 ‘암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성 지배층 지식인들이 외면했던 한글문화를 발전시켜 온 공로는 여성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대학에서 한국여성사 교양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가장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인터뷰를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과제를 준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머니 또는 할머니를 인터뷰하도록 추천해 준다. 그런데 보고서를 보면 매 학기 공통된 내용이 있다. 지금까지 어머니나 할머니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분들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그를 통해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이다. 항상 그들에게 어머니나 할머니는 희생과 봉사를 해주는 존재였을 뿐이지, 그들의 인생에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에게도 자신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평소에는 하지 못한다.
지금부터라도 여성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 한다. 어떤 여성들은 스스로의 삶이 특별한 것 없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삶도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기억되지 않았던 과거 여성들의 삶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어딘가 정리되지 못한 채 돌아다니고 있는 사진자료, 기록들을 이제라도 모아 자신의 삶에 대해 정리해 남겨둘 필요가 있다. 기록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