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을 꿈꾼다. 하지만 실제 인생에서 늘 승리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때로는 패배에 좌절하게 마련이다. 특히 너무도 간절히 원했던, 당연한 것이라 믿었던 승리를 놓치고 패배하게 됐을 때 느끼는 상처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주변의 위로조차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좌절을 딛고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학자인 내가 역사 속에서 배운 진리는 모든 결과는 긴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는 인생의 패배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거나, 거꾸로 인생의 승리자가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항상 승리자이거나 패배자인 경우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번의 승리에 오만할 이유도, 한 번의 패배에 좌절에 빠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5만원 지폐의 인물이며,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신사임당(1504~1551)도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남편은 자신의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녀는 늘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그녀의 능력도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아들인 율곡 이이가 훗날 17세기 노론 집권 세력으로부터 칭송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런 인물을 키워낸 현모로서 재발견되지 않았다면 신사임당은 결코 지금까지 역사의 승리자로 기억되는 여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후기에 이미 국내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더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최초의 한류 예술가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살아 있을 때 위대한 시인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능력이 부족한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아내, 시댁 식구들과의 불화, 자녀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 27세에 생을 마친 그녀는 처절한 인생을 살다 간 패배자였다.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으로 그녀의 시가 전해지고,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으로서 대접을 받은 것은 그녀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나혜석(1896~1948)의 인생은 더욱 굴곡이 많았다. 그녀는 수원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던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였다. 잘나가는 변호사이자 일본제국의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과 함께 프랑스 유학과 세계 일주를 경험했지만, 최린과의 스캔들로 모든 것을 잃고도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세상을 분노하게 했다. 결국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다가 결국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인생의 처절한 패배자였다. 그런데 오늘날 수원에는 나혜석을 기리는 공원과 거리가 만들어졌고, 신여성의 대표로서 인정받고 있는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다. 반면 그녀를 몰락으로 내몰았던 김우영과 최린은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 끌려가 수모를 당했고 오늘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존재들이 되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인생에서도 승리하고 역사에서도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아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라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아직 그대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혹시 그대가 죽을 때까지도 원했던 인생의 승리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역사적 승리자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인생이 아니라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이제 역사를 믿고 절망과 좌절에서 일어서라고 말이다.

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