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앵글로 지역 현안 공론화… 아시안계 정계 진출 활발해져
뉴욕 QPTV 녹화 현장 가보니
시청자가 직접 제작한 영상물을 방영하는 ‘퍼블릭 액세스(Public Access)’는 선진국에선 일반화됐지만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시민의 앵글로 지역 현안을 공론화하고 주류 미디어의 한계를 보완하는 효과가 크다. 또 세계 각국의 현지어로 방송되므로 이민자들이 자국어 방송을 보면서 향수도 달랠 수 있다.
QPTV를 찾아 플러싱 지역 내 한 건물에 들어섰더니 미국의 대표적 케이블TV 회사인 타임워너케이블의 독특한 로고가 눈에 띄었다. 편성 책임을 맡은 클리포드 제이콥스씨는 “뉴욕시와 협약을 한 타임워너케이블이 4개의 공동체 TV 채널을 제공한다. 이들 채널로 시청자 제작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방송사가 입주한 공간도 무료로 제공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고 시간도 없다. 그런데도 운영이 가능한 것은 타임워너케이블 가입자 50만명이 내는 요금의 일부를 지원받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선 자원봉사 프로듀서인 키리 프렌티스 목사가 녹화에 한창이었다. 그는 매주 두 번 57번 채널에서 기독교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프렌티스 목사는 “편집 교육을 받고 싶었는데 다른 기관은 비싸 엄두를 못 냈다. 100달러도 안 되는 비용으로 QPTV에서 양질의 미디어 교육을 받았다”며 “오늘은 오전 10시부터 4시간 동안 방송 장비를 무료로 빌려 녹화 중”이라며 만족해했다. 자원봉사 프로듀서는 400여 명. 소방관, 경찰관 등 직업도 다양하다. 제이콥스씨는 “시청자들이 대부분 황금시간대에 편성되길 원하기 때문에 방영 시간은 ‘제비뽑기’ 방식으로 정한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방송 워크숍도 인기다. 편집코스(10주), 현장 촬영(10주), 스튜디오 녹화(11주)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시청자가 만든 프로그램은 콘텐츠에 제한이 없다. 사전 검열도 안 한다. 이렇다 보니 방영 후 ‘후폭풍’이 불어올 때가 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옷을 모두 벗고 설교한 거예요. 나치당이 히틀러를 찬양하고, 10대 두 명이 이구아나를 죽인 후 요리하는 프로그램도 주민들의 항의가 거셌어요.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중에는 대통령을 협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프로그램이 방송돼 대통령 경호단이 찾아오는 소란도 일어났죠.” 제이콥스씨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미국에서 중요한 덕목”이라며 “문제가 되면 뉴욕 검찰청에 보내 불법과 합법 여부를 판별한다. 범법행위가 아닌 한 모든 프로그램을 검열 없이 내보내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시청률은 역시 파격적인 프로그램이 높다. 비만녀가 등장하는 ‘여신들’은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이날 방문단을 카메라로 촬영하던 루치오 드라고시 기자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담은 DVD를 방문 선물로 건네줘 뿌듯했다.
플러싱 지역 내 민권센터에는 이민 개혁 촉구 광고 캠페인이 실린 뉴욕타임스가 붙어 있었다. 이민법 개정은 10년째 이어온 한인사회의 최대 현안이다. 대한민국 전도가 걸려 있는 사무실에서 차주범 교육부장과 스티븐 최 사무국장을 만났다. 지난 1984년 뉴욕청년봉사교육원으로 문을 연 뒤 청년학교, 민권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동안 역할도 커졌다.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의 자녀를 위탁받아 방과 후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90년대부터 이민자 권익 옹호와 정치력 신장에 힘쓰고 있다.
“플러싱에 들어오는 7번 전철은 이민자 전철입니다. 저소득 노동자층인 라틴계와 한국인들이 타고 다녀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로 불렸지요. 직접 타보면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습니다.”(차 부장)
플러싱에 사는 한인 중 상당수가 빈곤선 이하 저소득층이다. 최근 들어 아파트 임대료가 올라 어려움이 더하다. 민권센터에 따르면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 중 절반가량이 월소득의 30~50%를 주택 임대료로 내고 있다. 경기침체로 실업수당을 받는 노동자들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이나마 합법 이민자에 해당될 뿐 대부분이 3D 업종에 종사하는 서류 미비 노동자의 고통은 극심한 상태다.
차 부장은 “미국의 이민 시스템은 붕괴된 상태다. 서류 미비자가 1100만 명에 이르고, 이민 업무는 적체돼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량 은퇴하면 노동력 부족 현상을 겪을 텐데 외국인 노동자 유치 비자 시스템은 한계가 많다”며 “역설적으로 친이민 정책을 표방한 오바마 행정부 들어 집권 4년 동안 매년 거의 40만 명이 추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바마는 후보 시절 집권 100일 안에 이민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해 이민자 커뮤니티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지만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과의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공약을 실천하지 못했어요. 대신 서류 미비자와 서류 미비 청소년들을 일부 구제하는 행정조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선 드림액트(Dream Act·서류 미비 청소년 구제 법안) 추진을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했지요. 이민자들이 사회 공헌도는 낮으면서 정부 혜택만 받는다는 인식은 편견입니다. 포괄적 이민 개혁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플러싱에선 아시안계의 정계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민 2세대인 최 국장은 “1세대는 이민자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2세대의 고민은 다르다.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코리안-아메리칸이란 의식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차 부장은 “화학적 결합은 어렵겠지만 1세대와 2세대는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한 곳을 향해 같이 가는 동지이자 친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