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롱~”

“화 장 대~”

할머니와 나만의 암호,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인사말, 전화를 통해 주고받을 때면 눈 감고도 인자하신 미소를 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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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유정
할머니와 ‘장롱과 화장대’를 둘만의 언어로 가지게 된 건 쑥스럽지만 어린 시절, 제 ‘욕’ 때문입니다. 제가 세 살 적에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방영되었답니다. 아마 저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 드라마를 본 모양인데요, 극 중에서 폐세자인 양녕대군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자기를 비웃듯 내뱉는 “이 잡놈들아~”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했고, 어린 저는 ‘잡놈’을 다행히도 ‘장롱’으로 알아들었던 겁니다. 세 살배기가 못마땅할 때마다 어른들을 향해 “이 장롱들아~”를 소리치면 할머니는 “아유, 내 새끼! 어찌 그걸 화날 때 쓸 줄 아누?” 하시며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답니다. 제가 “이 장롱들아~” 소리칠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화장대!”로 어린 손녀의 욕 아닌 욕을 무마해 주셨던 거죠.

이렇게 시작된 ‘장롱과 화장대’는 지금까지 할머니와 저를 잇는 끈끈한 암호가 되고 있답니다. 할머니를 뵐 때면 저는 “장 롱~”으로 인사하고 할머니께서는 “화 장 대~”로 반겨주십니다. 몰래 용돈을 주실 때면 낮은 소리로 “화장대~” 하고 사인을 주시고, 엄마께 꾸중을 듣거나 힘든 일이 생겨 속상할 때도 안쓰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화 장 대~” 하며 위로하시면 저는 금세 마음이 편해져서 “장 롱~” 하고 할머니 품에 안깁니다. 제가 부끄러움을 알게 된 나이쯤에 ‘장롱’ 인사를 꺼리자 할머니께서는 서운해하셨고 “이 할미가 죽을 때까지 내 새끼랑은 장롱과 화장대여” 다짐을 두셨죠.

그 시절, 할머니는 ‘홍길동 누나 홍순덕 여사’ ‘동킹콩’ ‘태평동 왕할머니’라는 별명들이 말해주듯 건강하고 활달하시며 인정 많기로 소문난 여걸이셨답니다. 가난한 집에서 아기를 낳으면 손수 탯줄을 잘라주시고 배냇저고리와 미역을 선물하셨으며, 친목회를 만들어 여행도 다니시고, 동네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사무소에서 ‘통장위촉장’을 받으시는 등 동네에서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이집 저집에서 놀러 오기를 청할 때면 꼭 저를 업거나 안고 마실을 가셨다는데, 기억에는 없지만 그때의 젊고 건강하신 할머니가 무척 그립고, 안타까워집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때의 할머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올해 연세 일흔아홉,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십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직장암에 걸려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하셨고, 암을 벗어나자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으로 양쪽 골반뼈가 괴사되어 차례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세 차례의 허리 수술과 두 차례의 허벅지 수술, 할머니를 수술실로 보내드릴 때마다 온 가족이 모여 흘렸던 눈물과 슬픔, 비장함은 어쩌면 따로 사는 가족을 서로 더욱 애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워낙 쇠약하셔서 수술실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경고는 할머니의 불운을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 위에 바윗덩이처럼 얹혀 가족이 감당하기 힘들었고, 회복실에서 실려 나오는 할머니를 뵐 때면 ‘불구라도 좋으니 살아있는 어머니를 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들이었다고 아직도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십니다. 그렇게, 자그마치 여덟 번 수술에 일곱 번의 전신마취를 겪으면서도 할머니는 불가사의한 생명의 힘을 보이셨고, 흐트러진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으시며 병을 이겨내셨습니다. 긴 세월을 투병하시는 동안 68킬로그램의 몸은 46킬로그램의 작고 위태로운 모습이 되셨고, 스스로 걷지 못하시기 때문에 휠체어와 보행 기구에 의지하시면서 극심한 골다공증과 후유증들을 견뎌내며 생활하시는 걸 지켜보면 감동과 존경심이 저절로 솟아납니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절통하지만, 아직 다 못 한 사람 노릇하다가 곱게 죽고 싶다.”

할머니의 이 간절한 의지와 가족의 사랑이 할머니를 지키고 있나 봅니다. 할머니께서는 함께 살자는 큰삼촌의 애타는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따로 사시면서 할머니보다 먼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시고, 할머니 말씀대로 ‘내 살림을 내가’ 챙기십니다. 중병 환자가 다른 환자를 돌보며 도움도 없이 집안일을 하시면 자식들 모두 불효라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깔끔한 성격과 강인함은 가족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허리 수술이 잘못되어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기 전까지 할머니는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기르셨고, 80개가 넘는 화초를 가꾸셨으며 꽃이 만발하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봄을 느끼라고 낮은 담장 위에 화분들을 올려놓으셨습니다. 항암 치료 때문에 음식 맛을 잘 모르겠다고 속상해하셨지만 변함없는 음식 솜씨로 자식들을 먹이셨고, 한글학교에 다니시며 쓰기를 익히셨습니다. 여덟 남매의 맏딸인 할머니는 그 옛날, 살림 밑천이 되어 야학에서 겨우 읽기를 깨치셨고 그나마도 다 못 배운 걸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건강하셨을 때 통장위촉장을 받으시고는 “사람은 그저 배워야 한다”며 쓸쓸한 표정이 되셨던 할머니를 꼼꼼한 엄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뿐인가요, 어디서 아셨는지 태국의 치앙마이에 사는 가난한 동포들에게 보낼 헌옷을 수집하는 것을 아시고, 이웃들과 함께 몇 박스나 되는 헌옷을 모아주셨고, 옆집 지하에 세 들어 사시는 우리 할머니보다 더 연세 많으신 할머니를 지금껏 돕고 계십니다. 혼자서 폐지와 빈 병을 주워 생활하시는  그 할머니를 위해 딸들과 며느리에게 재활용 쓰레기로 내놓는 폐지와 신문, 빈 병, 캔, 그리고 값이 더 나간다는 프라이팬이나 스텐 냄비 등도 버릴 일이 있으면 꼭 모았다가 “이 에미 보러 올 때 가져다 달라”고 당부하셨지요. 할머니는 그것들을 누가 더 많이 가져 오는지 체크라도 하시는지 일주일 이상 실적(?)이 없는 자식한테는 “기왕 버릴 거 불쌍한 할머니 도와주면 좋지 않으냐”고 주의를 주셨지요.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우리 엄마는 잔뜩 모은 신문을 미처 못 가져다 드리고 쌓아 놓았다가는 이사할 때 짐바구니에 챙겨 가는 열성을 보이셨답니다. 이러다 보니 저조차 전염이 되어 학기가 끝나면 버리게 되는 문제집 등을 친구들에게서 받아다가 모아두게 되었죠. 할머니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가르침이 저뿐 아니라  사촌 동생들에게도 아름다운 습관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귀찮고, 자기 몸을 아끼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일 텐데, “죽으면 없어질 몸, 아껴서 뭐하나”며 환자의 모습으로 누워 계시기보다 언제나 열심히 사시는 우리 할머니, 특목고에 진학한 이후 주말조차 없게 된 저는 방학 때나 할머니를 뵐 수 있게 되었고, 그 대신 휴대전화가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대개 20번 이상 전화벨을 울려야 합니다. 주방에 계시거나 욕실에 계실 때, 집 전화기 옆에 계시지 않고는 휠체어나 보행 기구에 의지해서 전화를 받으실 때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휴대전화기를 목에 걸고 계시라고 그동안 숱하게 말씀드려도 “나 같은 늙은이까지 그걸 왜 하느냐”며 거부하신 할머니께서 드디어 저 때문에 휴대전화기를 목에 걸고 계신답니다.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와 할미한테 전화하면 피곤하니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 뒤에 20번씩 전화벨 울리지 말고 편히 전화하라는 저를 위한 배려이십니다. 사실 저는 학교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우울할 때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리는 게 아니라 할머니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 새끼, 밥 잘 먹고 잘 있지? 에미한테는 공부 너무 시키지 말라고 잔소리했지만 잘 참고 열심히 해서 꼭 한림학사 돼야 혀!”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한림학사란 공부 많이 해서 벼슬을 하라는 뜻인 것 같은데요, 엄마나 선생님께서 공부하라면 중압감을 느끼지만  할머니 말씀은 저를 즐겁게 합니다.

제가 ‘기억’이란 걸 갖게 된 나이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늙고, 병든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어렸을 때 저는 누구나 늙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되는 줄 알고 늙는다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삶’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깨침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가족이 탄식처럼 말하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날개 꺾인 새처럼’ 병원에 가실 때 외에는 외출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사시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 할머니, 저는 그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시며 마음을 키워 주신 손녀딸입니다.

“할머니, 제가 한림학사 될 때까지, 아니 그보다 먼 훗날까지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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