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세상사, 삶의 원리를 인연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나에게 해만 끼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악연이라 고쳐 부르며 그것 역시 내 삶의 궤도 중 하나임을 말해준다. 좋은 인연만을 기억하고 싶지만 사실 기억에 더 남는 것은 악연이다. 불교의 연기설의 바탕이 되는 ‘겁’이라는 개념도 이 인연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천지가 개벽하고 다음 개벽까지의 시간,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어 없애는 시간, 사방이 15㎞나 되는 성을 겨자씨로 채우고 다시 그것을 비워내는 시간, 작은 새가 내려앉았다 떠나기를 반복해 산만 한 바위가 모래가 되는 시간 말이다.

이렇게 긴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우리는 옷깃을 스치는 것일까? 억겁의 시간을 지나야 옷깃을 스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며, 부부나 가족이 된다. 이런 불교적 경구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인연은 복잡한 것임에 틀림없다. 부처는 자식을 두고 라훌라, 즉 사슬이라고 불렀다지만 자식만 해도 그렇다. 발목에 걸린 무거운 족쇄처럼 자식은 나의 자유를 붙잡는다. 마음대로 영화를 보고, 놀고,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심지어 일하는 순간마저도 마음에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뿐일까? 아이 때문에 물리적으로 일하고 공부할 시간을 침범 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이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준다. 마음이 다치고 몸이 지친 어느 날 밤 깊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체온은 어떤 항우울제보다 강력하다. 항우울제가 죽고 싶은 마음까지 다스려주지 못한다면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살 이유가 되어준다. 너무 힘들게 하지만 그 아이 때문에 삶의 시간은 베풀고 감사해야 할 시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비단 아이뿐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남편이, 아내가 그럴 것이다. 그들 때문에 때론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지만 그들 때문에 삶의 이유가 생겨나기도 한다. 혈연이라는 인연은 그렇게도 무섭고도 질기다.

하지만 삶의 질곡을 만날 때 우리는 이 인연이라는 말 앞에 담담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뜻밖의 행운을 만났을 때야 내 복이지만 의외의 불행을 만날 땐 작은 나를 내가 감싸느라 분주하다. 나를 감싸면서 주위를 원망하고, 신의 불공평함과 아둔함에 대해 화를 낸다. 친구의 배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그렇게 나는 나약하고 비겁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되뇌어 보지만 그 자기 수련이 잘 안 되고 만다.

박완서 선생은 아들을 잃고 난 후 깊은 시름에 빠져 있을 때 밥 냄새가 고역이었다고 한 적 있다. 아들이 죽고 나서도 시시때때로 비어 있다 호소하는 장기는 비정하다 못해 야만적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 밥 냄새 때문에 그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밥심’이라는 게 그렇게 비정하기도 하지만 그게 바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니 말이다. 모든 인연들도 그럴 테다.

나름 기대했던 일들이 틀어지고, 세상의 어수선함을 배워갈 때 나 역시 바닥을 들여다보고 이런저런 인연의 고리를 찾아간다. 물론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너무 골몰해서 때론 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글 쓰고 책 읽는 나의 일상을 잊기도 한다. 멀찌감치 일상과 떨어져 있는 나를 보면 또 한 번 나약한 나 자신에 다친다.

하지만 애써 이렇게 되뇌는 거다. 모든 시련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세상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연들이 산적해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처럼 예쁜 리본과 포장지를 두르고 기다리고 있다. 물론 열어 보았을 때 어떤 것은 선물이 아닌 악재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소박하게 생겼지만 정말 큰 감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삶이란 그렇게 우연성과 일회성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기대를 갖고 12월 24일처럼 사는 것, 너무 호들갑 떨거나 너무 야단 떨지 않기를, 그렇게 나를 단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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