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외국인 투자자가 직접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ISD라는 용어도 이젠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그곳 사회와 정치체제, 그리고 그에 따른 문화를 겪고, 또 국가의 개방을 거쳐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이러한 논란이 때로는 신선하게 보이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자치구로 남아있는 내몽골을 제외하고 1921년 옛 소련의 도움을 받아 외몽골이 몽골국으로 독립하게 되면서 몽골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소련의 형제국이자 위성국으로 70년이 넘게 존재해왔다. 그러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영향을 받아 몽골이 90년대 초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나라가 자본주의 체제로 갑자기 변해 사회의 격동기를 경험했다.

사회주의하에서는 학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정부가 정해준 대로 외국에 유학을 하든, 공장에서 일을 하든, 양치기를 하든 정해진 일을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소위 ‘위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했다. 개인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판다거나 사업 같은 일을 하면 아주 불량한 사상을 가진 나쁜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을 배웠고, 미국 일본 등 자본주의자들의 폐해에 대해 자세히 배웠다. 북한과 동독은 아주 가까운 나라였다. 사회 자체가 개인의 성격적 특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사회였다. 돌이켜보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따른 억압과 합리화 등의 방어기제가 끊임없이 그 효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비합리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었다.

역사를 통해 보면 개방된 국가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살아남은 경우는 거의 없다. 옛 소련도 그렇고, 몽골과 동독 그리고 동유럽 위성국가의 경우가 그렇다. 격동의 21세기 모든 이들이 다양한 가치관과 다양한 생활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정책이 있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국민을 보듬는 정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정치이론, 소위 ‘마키아벨리즘’을 제창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았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했다. “불의는 있어도 질서 있는 나라와, 정의는 있어도 무질서한 나라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당시의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행하게 끝났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정치이론가나 작가로서의 재능을 가졌음에도 정치활동 중에는 성공보다는 좌절을 겪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함축된 깊은 의미와 함께 작금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다만, 국민이 ‘알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은 국가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둥근 공은 어디서 보더라도 같은 모양이다. 정부가 정보와 정책을 숨기거나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그 장단점을 솔직하게 알려준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아직 보여지는 모양은 둥글게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같은 편에 있거나 또는 반대편에 있는 정치인들의 수많은 주장도 아직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둘만 들자면 국방과 먹을 것이 될 것이다. 한·미 FTA는 광의의 ‘먹을 것’을 건드리는 국가의 중요한 사안이다. 우리들이 이 나라의 국민임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정치가와 행정가들이 국민 복지의 최대공약수를 찾아내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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